[감성 여행] 해적을 다스린 섬, 바다를 가졌건만 어찌 이리 고요할꼬

전남 완도 (下) … 장·보·고

1200년이 흐른 청해진은 제2의 해상왕을 기다리고…
햇빛·바람을 낚아 나무에게 준 듯 상록수 빼곡
황칠나무 오묘한 금색 수액, 중국 황실서도 탐내
'개도 광어는 안 먹는다'는 완도 어판장엔 가을 전어가 한자리 꿰차고

1981년에 1종 어항으로 승격한 완도항은 완도군의 중심항이다. 작은 어선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늘거리는 물양장 풍경이 한가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항구의 코앞에 자리잡은 주도(珠島)는 공중을 오가는 햇빛 · 바람 등을 낚아 나무들에게 나눠주느라 부산하다. 참식나무,돈나무,사스레피나무,붉가시나무,감탕나무 등 상록수들로 빼곡한 주도 상록수림(천연기념물 제28호)은 한반도 남 · 서해안에서만 자라는 두릅나뭇과의 상록교목인 황칠나무가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칠나무의 황금색 수액은 주로 왕실에서 사용했던 희귀한 전통 도료다. 중국의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당 태종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황칠을 채취해 그것을 철갑옷과 화살촉에 칠해 햇빛에 더욱 빛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고대 중국도 황칠을 몹시 탐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도 '탐진촌요(耽津村謠)' 15수에서 "완주(완도)의 황옻칠은 맑기가 유리 같아(莞洲黃漆瀅琉璃)/ 그 나무가 진기한 것 천하가 다 알고 있지(天下皆聞此樹奇)"라고 황칠을 예찬했다. 언젠가 황칠 재현에 앞장선 홍동화씨의 황칠은합을 본 적이 있는데 색감이 어찌나 오묘한지 부처님이 황칠의 아름다움을 알았더라면 섣불리 '색증시공(色卽是空)'을 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출입이 금지된 '봉산(封山)'인 주도를 먼발치서 관망만 하다가 그만 돌아선다. 해변공원의 끝,음식 특화거리와 수협어판장이 있는 가용리를 향해 걷는다.

예부터 '개도 광어는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완도는 수산물 집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활 · 선어 어판장에는 넙치 · 전어 · 가리비 · 줄돔 · 새우 등이 즐비하다. '대가리에 깨가 서 말'이라는 가을 전어들이 어판장 한 자리를 꿰찬 채 으스대고 있다. 완도 전어는 뻘 냄새가 나지 않아 타 지방 전어보다 더욱 맛있다고 한다. 살이 단단한데다 맛이 담백해서 여름철 별미로 꼽히는 다금바리의 사촌격인 능성어도 더러 눈에 띈다.

2층 건어물 판매장엔 가게마다 건어물이 그득하다. 예전에 김농사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많다 해서 완도를 '돈섬'이라 불렀다는 얘기가 헛말이 아니다. 장도 장보고유적지로 가는 길목인 죽청리 야산에는 거대한 장보고 동상이 서 있다. 불 꺼진 역사의 항구

청해진성을 연상케 하는 자연 석축과 넘실거리는 파도를 형상화한 건물이 인상적인 장보고기념관을 거쳐 지난해 설치한 180m 길이의 목교를 건너 장도(사적 제308호)로 건너간다. 맨 먼저 만나는 것은 외성 밖에 있는 우물이다. 성 밖에 우물을 판 것은 아무래도 청해진을 드나드는 배들이 식수를 조달하기 편리하도록 배려한 것이리라.'복원'한 성안으로 들어가니 돌을 판판하게 깔고 흙을 다지는 판축 기법으로 쌓았다는 옛 토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에서 가장 높은 동남치 위에 올라서자 좌로는 고금도 봉황산,우측으로는 신지도의 상산과 완도항까지 두루 보인다. 뒤로는 장보고가 지은 절인 법화사지가 있는 완도의 진산 상황봉(644m)이 우뚝하다. 토성 위에 앉아 장보고가 장도에 청해진을 세운 까닭을 저울질한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m.수심이 채 2m도 되지 않을 만큼 얕고 하루 두 차례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서 드나들 수 있다. 육지로부터 가까워 물자를 원활하게 보급받을 수 있고,바다 자체가 자연적인 해자(垓字) 역할을 하는 터라 방어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해자란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성 밖을 빙 둘러 판 못을 말한다. 성 꼭대기 숲속에 자리잡은 당집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곳에선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장보고를 주신으로 한 당제를 올린다고 한다.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엔 3만여점이 넘는 기왓조각이 출토된 기와무지 터가 있다. 권위와 부의 상징이었던 기와가 그렇게 흔했을 만큼 청해진 세력이 매우 강성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서남쪽 해안으로 내려가자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높이 30~40㎝가량의 목책성 흔적이 나타난다. 이토록 공들여 성을 축적했지만 정작 청해진의 적은 내부에 있었다. 왕위 계승과 관련한 권력다툼에 휘말린 장보고는 자객 염장에 의해 암살당하고 청해진은 그로부터 5년 후 문성왕 13년(851)에 폐쇄되고 말았다.

죽음 이후에도 역사는 계속된다그의 죽음으로 청해진은 영영 잊혀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1000년이 지난 후 청해진에서 멀지 않은 강진 도암에서 귀양살이를 한 다산 정약용은 '탐진어가(耽津漁歌)' 10장에서 "궁복포 앞에는 나무가 배에 가득(弓福浦前柴滿船)/ 황장목 한 그루면 그 값이 천금이라네(黃腸一樹値千錢)/ 수영의 방자놈은 인정이 두둑하여(水營房子人情厚)/ 수양버들 아래 가서 술에 취해 누워 있다(醉臥南塘垂柳邊)"고 장도 포구 풍경을 그리고 있다. 또 다산은 《다산시문집》 곳곳에서 완도 앞바다를 궁복해,포구를 궁복포,주변의 산을 궁복산이라 적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도 《대동지지》에서 "당 보역 연간에 당나라 사람이 신라의 변방 백성을 많이 약탈하여 노비로 삼으니,흥덕왕이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만명의 군사를 일으켜 청해에서 중국의 약탈하는 사람을 방어하였다"고 쓰고 있으니 청해진의 역사는 1000년이 지난 조선후기까지도 잊히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청해진을 세워 해적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중국 산둥반도에 법화원 · 신라방 · 신라원을 세워 신라인을 보호하고 귀국을 돕기도 했던 '활 잘 쏘는 사람' 궁복(弓福) 장보고(?~846).그는 이 세상에 너무 일찍 와버린 사람이다. 목숨을 걸 각오가 아니라면 개척자의 삶을 산다는 건 위험하다. 세상과 발맞추지 않고 홀로 앞서나간다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명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인' 장보고가 죽음으로써 고대 한반도 사람들은 세계에 대한 낡은 패러다임을 바꿀 절호의 찬스를 놓쳐버렸다.

바야흐로 글로벌 해상무역을 꿈꾸었던 장보고가 그리던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복권되고 있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날이 흐려진다. 방금 건너온 장도가 저만치 가물가물하다. 고은 시인의 '장보고의 바다(만인보 24권)'라는 시를 떠올리며 장도를 떠난다. "(전략)태풍을 견딜 힘 있으면/ 바다를 가진다/ 해적을 다스릴 섬 있으면/ 바다를 가진다/ 모든 바닷가 나라들의 닫힌 문 활짝 열 힘이면/ 보라 바다를 가진다/ 한 섬에서 태어난 사나이가/ 세계의 사나이로 퍼져나갔다/ 그 사나이가/ 세계로부터 돌아오자/ 죽음이었다// 바다 곡성(哭聲)/ 파도 곡성/ 아흐레 밤낮 찼다. "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 맛집

완도읍 터미널 부근 광주식당(061-552-0441)은 큰 부담 없이 남도 음식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한정식집이다. 된장찌개,고등어찜,조기,문어,편육,전과 젓갈,홍어와 각종 나물이 푸짐하게 올라온다. 한정식(1인당) 1만2000원,백반 7000원.◆ 여행 팁

완도항여객터미널에선 제주도와 신지♥약산♥노력도 등 여러 섬으로 가는 여객선을 운항하고 있으며 화흥포항(061-0553-8188)에선 노화♥보길도행 배를 운항하고 있다. 완도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는 하루 세 차례 출항한다. 제주도행 07:30(한일카훼리 1호),10:40(한일카훼리 2호),15:30(한일카훼리 3호) 운임은 2만4000원.소요시간은 한일카훼리 1호(061-544-3294) 3시간30분,2호(061-544-8000) 3시간,3호(061-554-8000) 5시간(추자도 경유).문의 완도여객터미널(061-552-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