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발레복 입은 건 스무살 때…아스팔트 공연도 마다않죠"
입력
수정
국내 최고 발레리노 이원국 이원국발레단장
관람료 낮추고 직접 해설…아줌마·아저씨·꼬마팬 많아져
야외공연 6년 동안 비 온 적 없어…'홀로서기' 한 뒤 주량도 늘었어요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제가 발레를 처음 접한 것은 스무 살 때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맹탕이었어요. 부산에서 동명공고를 다닐 때인데,사실은 제가 문제아였거든요. 하도 부모님 속을 썩이니까 어느 날 어머니가 절 끌고 발레학원엘 갔죠.지은 죄가 많아서 이번만큼은 어머니 말씀을 따르자 마음 먹고 6개월을 '착실하게'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필이 팍 왔죠.이거다 싶더군요. 뭐랄까 한번도 맛보지 못한 짜릿함,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좌악 펼쳐지는 느낌이었어요. "
한국 최고의 발레리노이자 최고령 현역 무용수인 이원국 이원국발레단장(43).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지내고 러시아 키로프발레단과 루마니아 국립발레단 초대 수석무용수로 세계 무대를 주름잡은 그가 스무 살에 처음 레오타드(발레 타이즈)를 입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말썽꾼으로 공고를 6년 만에 겨우 졸업했다는 사실은 더욱 의아하다. 그는 "아버지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졸업도 못했을 것"이라며 넉살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40대 중반에 접어든 그가 날마다 땀을 비오듯 쏟으며 점프 연습을 거듭하는 것은 '잃어버린 시절'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2004년 국립발레단을 그만두고 황야로 나섰을 때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단 발레단을 만들고 소극장을 빌려가며 발레 인생을 새로 시작했다. 홀로서기에 나선 지 6년.지난해부터는 노원문화예술회관 상주단체로 선정돼 셋방 신세를 면했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처음엔 정말 막막했죠.생각으로는 발레단을 만들고 공연하면 된다 싶었는데 아무도 안 불러줬어요. 다행히 메세나협의회에서 지원금이 나와 2005년 1월부터 전국 공연을 8회 다녔는데,그게 출발점이죠.제자들을 모아 무용수 15명으로 시작했어요. 지금은 20명입니다. 함께 하자고 했더니 다들 흔쾌히 응해줘 고마웠죠.단장이란 권위,그런 것 다 버리고 일종의 프로젝트 컴퍼니 성격으로 시작한 거죠.전슬기라는 제자는 국립발레단 오디션을 봐야 하는데 제가 꼬드겨서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7년반 유학해 러시아 발레와 언어까지 뛰어난 친구죠."
이 같은 '친구'들 덕분에 그는 6년간의 고생길을 그나마 따뜻하게 걸어올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지역 주민 팬들이 엄청 많이 생겼어요. 아직 우리 문화 수준에서는 발레 보러 가는 것을 '수줍어' 하잖아요. 다음 달에 올리는 '지젤' 전막 공연도 지역 주민들이 쉽게 보러 올 수 있도록 배려했지요. 관람료도 아주 싸게 책정하고.관객이 발레를 좋아해줘야 예술성도 빛나고 경제적인 문제도 나아질 것 아닙니까?"문화회관에서 발레를 본 노원구민들의 반응은 뜨겁다. 그가 매월 셋째주 목요일 해설을 곁들여가며 '발레로 들려주는 12가지 사랑이야기'를 공연하자 아줌마,아저씨,꼬마 팬들이 급증했다. "지난 4월부터 소극장에서 하는데 전석 1만원이에요. 여기에 다둥이카드 소지자 10% 할인,기초생활수급권자 장애인 및 국가유공자 50% 할인,초 · 중 · 고생과 단체 20% 할인 혜택까지 곁들이니까 부담없이 보러 오죠.혼자 보기 아까워서 블로그 등을 통해 홍보하고 아이들도 데리고 오고 그러더군요. 이젠 길을 가다가도 저와 악수하고,아이들도 '선생님 재미있었어요,멋있었어요'라며 사진을 찍자고 하는 걸 보면 정말 뿌듯합니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때도 이런 일은 많지 않았어요. "
그가 노원구로 옮겨온 지 1년 만에 300석 규모의 소극장은 매번 매진 사례다. '해설이 있는 발레'를 시작한 것은 그의 꿈인 '발레 대중화'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동요 '악어떼'에 발레 동작을 넣는다든지,'옹헤야'를 과감하게 활용하기도 하지요. '옹헤야'는 마지막 앙코르로 자주 쓰는데 관객들이 전부 일어나서 박수 치고 난리죠.발레에 '옹헤야'를 쓰는 게 새롭고 신기한 모양이에요. "
그는 대학로에서도 매주 월요일 저녁 갈라 공연을 갖는다. "2008년 4월 최초로 국내 소극장에서 상설 발레공연을 올렸죠.창조아트홀에서 지난해 말까지 했고 휴식기를 가지다 올해 7월부터 대학로의 성균소극장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하이라이트를 편집한 갈라 공연이죠.고전발레부터 모던발레,이원국 창작발레 등을 두루두루 섞어서….발레 동작 설명이나 역사 해설에서 벗어나 제가 무대에서 겪은 에피소드 등을 함께 나누면서 80분 정도 하지요. 지난 월요일(18일)로 102회를 맞았는데,이 덕분에 제가 입심이 좀 늘었습니다. 하하."그는 발레 공연을 원하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 지난 5월 옥천에서 열린 '지용제' 기간에는 정지용 시인의 시 '바다'에 맞춰 안무했다. 마산도 단골 무대다. "대학 입시 때 연탄불 때면서 안방을 내준 선배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의리 때문에 매년 마산엘 갑니다. 수요문화대학(마산 성산아트홀) 주부대학 같은 곳인데 작년에 거기서 30분 얘기하고 40분은 우리 단원들과 공연을 했죠.그랬더니 우리 강연이 1등이라며 올해도 또 와 달라는 겁니다. 한 사람 출연료도 안 되는 돈을 받고 14명이 함께 가니까 인건비를 따지면 완전 밑지는 거죠(웃음).한번은 '마산의 밤'(원제 '사랑과 죽음')이라는 창작 모던발레를 만들었는데 제가 포주 역할을 했죠.마산 국제춤축제였는데 어머니가 와서 보시고는 만날 왕자 역할만 하던 네가 바닥을 기어다니고 그게 뭐냐 하면서 슬퍼하는 겁니다. 그래서 둘째날엔 그 대목을 빼고 했죠."
그는 인천이나 군산,목포 등에도 자주 '출몰'한다. 올해 공연만 150차례 이상이다. 이달 들어서만 20회나 무대에 올랐다. "1993년에 주연으로 데뷔했는데 그때만 해도 1년에 공연이 2개 정도였으니까 주연을 맡을 기회도 많지 않았죠.지방 공연 때 한 주부가 10여년 전 예술의전당에서 본 기억을 떠올리며 '이원국씨가 아직도 춤추나' 하고 찾아왔다가 절 보고는 감동적인 표정을 지었어요. 요새 기립박수를 더 많이 받습니다. 강릉 공군부대에 갔을 땐 허름한 식당으로 쓰던 창고와 연병장 농구대 앞 아스팔트 중에서 무대를 선택해야 했어요. 얇은 고무판만 깔고 아스팔트 위에서 점프하는 건 어찌보면 자살행위이지만 눈 딱 감고 결정했죠.거기다 비까지 오려고 하더만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6년간 야외공연하는 동안 비가 온 적이 없어요. "
그는 항상 이 공연이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혼신을 다한다고 했다. "관객도 무용수도 다 넘어야 하는 게 발레예요. 요새는 발레단 경영까지 책임져야 하니까 무대에서 말발이 더 세졌다는 소리도 듣죠.우리 단원들 먹여 살려야 하니까요. 전라도 가면 전라도 말로 해설하고 경상도에선 경상도 말로 인사합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서울말이 안 돼요,거 참.여수에도 팬이 많아서 '워매 반가워불고만.어째 이렇게 많이 왔다요. 나가 오늘 아주 죽어불랑께' 이렇게 너스레를 떨죠."그는 "발레도 한국의 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악이나 판소리처럼 발레도 우리것이라고 생각해요. 서양무용으로 분류돼 왔지만 100~200년 후에는 우리 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원래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나왔지만 러시아가 더 원조 노릇을 하잖아요. 물론 우리 무용수들이 세계적인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덕목을 갖추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단원들에게 일본어와 영어 원어민 교사를 초빙해서 외국어를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웬만한 회화는 다 해요. "
4년 전부터는 술이 많이 늘었다. 재정적인 문제로 고뇌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고 발레리노인 그는 무척 화려하게 사는 것 같지만,발레 대중화에 몰입하느라 19평짜리 주공아파트 월세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단원들부터 늘 챙긴다. "토슈즈 한 켤레가 세 번 공연하면 다 해집니다. 본드를 칠하고 두꺼운 실로 몇 바퀴 돌려서 꿰매 쓰죠.실크 같은 분홍색 공단이 벗겨지면 발가락이 아파 더 못 신어요. 큰 기업이나 후원회 등이 우리처럼 작은 민간 발레단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줘도 좋을 텐데…그죠?"
만난 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 이원국표 로맨틱 발레 '지젤' 11월 5~7일 전막공연
이원국발레단은 내달 5~7일 노원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전막 발레 '지젤'을 무대에 올린다.
'지젤'은 로맨틱 발레의 대명사다. 달빛 아래에서 너울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요정들의 몸짓이 눈부신 작품.1막에서는 순박하고 명랑한 시골 처녀 지젤이 가장 행복한 순간을 앞두고 연인의 배신으로 괴로워하다 숨을 거두는 모습으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2막에서는 싸늘한 영혼이 된 그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연인을 숭고한 사랑으로 살려내며 관객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작품은 1막에서 극적인 연기력을 보여줘야 하고,2막에서는 고난도의 기술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발레의 교과서'로 불린다. 원작은 1841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공연됐다. 이원국 재안무 · 연출로는 2006년 11월 성남시민회관에서 초연한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전막 작품이다.
'영원한 현역' 이원국 단장이 연출뿐만 아니라 직접 출연해 더욱 눈길을 끈다. 그는 둘째날인 6일 저녁 공연에서 최예원과 호흡을 맞춰 주역을 연기한다. 또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였던 장운규가 새로 영입돼 이번 공연에서 알브레히트 역할을 맡는다. 지난달 '라이몬다' 공연을 끝으로 국립발레단을 떠나 이원국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최근 합류한 전효정 전 국립발레단원과 함께 공연 첫날 주역 연기를 펼친다. 지난 7월 바르나 콩쿠르에서 주니어 부문 1위를 차지한 꿈나무 김기민과 국내 발레계의 차세대 스타로 떠오르고 있는 유니버설발레단의 한서혜가 특별 초청 게스트로 짝을 이뤄 마지막날 무대를 장식한다. 관람료는 2만~3만원.홈페이지(www.nowonart.kr)에서 다양한 할인 조건을 확인한 뒤 온 가족이 함께 보더라도 부담없는 가격이다. 이는 발레 대중화를 이끄는 이원국발레단의 관객 서비스 목표이기도 하다. (02)951-3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