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포도향에 취해 뭉실한 구름 위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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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나파밸리 와이너리 투어갓 수확한 포도로 가득 찬 커다란 오크통에 여인들이 뛰어든다. 치마를 걷어올린 이들은 풍요를 기원하며 맨발로 포도를 밟는다. 과즙이 튀고 치마에 붉은 포도물이 든다. 오크통 밖의 남자들은 흥겨운 수확의 노래를 부른다. 폴(키아누 리브스)과 빅토리아(아이타나 산체스)는 서로 바라보며 사랑을 느낀다.
미국 명품 와인 산지로 명성
와이너리 투어 120여 곳 가동
동아원 '다나에스테이트'도 눈길
1995년 만들어진 로맨스 영화 '구름위의 산책(A walk in the clouds)'은 미국 와인의 심장인 캘리포니아주 나파밸리의 와이너리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처럼 10월의 나파밸리는 하비스트(Harvest) 시즌이다. 새벽녘에 농익은 포도를 따는 인부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효통에서 나는 알코올 섞인 포도향이 계곡 전체를 감싸돈다. 수확이 끝난 포도나무는 노랗게 물들어가며 흐드러질 듯 가을을 장식한다.
◆나파는 미국 와인산업의 심장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지나 북동쪽으로 1시간30분 정도 차를 달리면 29번 도로 양 옆으로 '끝없는' 포도밭이 펼쳐진다. 넓은 포도밭과 길 옆 기찻길을 따라 자리잡은 와이너리들.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만 봐도 '여기는 캘리포니아구나' 싶다. 나파밸리의 면적은 약 480㎢.남북으로는 40㎞에 달하지만 동서로는 12㎞ 정도로 좁다. 칼리스토가와 세인트헬레나와 러더포드,나파 등 6개 마을이 29번 도로를 따라 형성돼 있다. 캘리포니아의 태양이 만든 지중해성 기후와 화산재로 이뤄진 기름진 토양,북태평양과 샌프란시스코만을 통해 유입되는 차가운 바다 바람과 안개 덕분에 일교차가 커 포도가 자라기엔 최적의 조건이다.
1860년대부터 포도밭이 들어섰지만 1919년 금주법으로 대부분의 와이너리가 문을 닫았다. 1940년대에 와인 생산이 재개됐다. 1976년 파리에서 열린 '파리의 심판(블라인드 테스팅)'에서 예상을 뒤엎고 나파산(産) 와인이 레드와 화이트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면서 나파는 골든스테이츠(캘리포니아의 별명)의 '골드'로 떠올랐다.
와인 생산량은 많지 않다.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와인의 90%를 만드는 데 이 중 7%가량이 나파에서 나온다. 그러나 품질로 보면 얘기가 다르다. 소매가격 20달러가 넘는 와인은 대부분 나파산이며 스크리밍이글과 콜긴,할란 등 수백~수천달러를 호가하는 컬트와인(까다롭게 만들어 와인 마니아 사이에 초고가에 유통되는 와인)은 모두 나파에서 나온다. 국내 업체인 동아원이 투자해 세운 '다나 에스테이트'도 나파에 자리잡고 있다. 10월의 나파는 해뜨기 전부터 시끄럽다. 이른 아침에 포도를 따야 햇볕에 마르지 않아 좋은 와인을 담글 수 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 '가을날(Autumn Day)'에서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주소서(Drive final sweetness to the heavy grape)'라고 하늘에 기도했듯 수확철엔 하나 하나에 정성을 쏟는다.
◆와이너리 투어
나파 여행의 백미는 와이너리 투어다. 근사한 와이너리에 들러 와인을 시음하고,그에 걸맞은 음식을 곁들이면 미각의 축제가 펼쳐진다. 눈에선 와이너리의 풍경이,입에선 와인의 향이 떠나질 않는다. 마지막엔 와이너리 선물가게에 들러 좋아하는 와인이나 선물을 사면 된다. 통상 소매가격의 20%가량 할인해준다. 270여곳의 나파밸리 와이너리 중 120여곳이 투어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칼리스토에 자리잡은 스털링 빈야드(포도원)는 체계적인 투어 프로그램에 힘입어 관광명소로 발전한 곳이다. 방문자센터 앞에 차를 세우고 입장권(시음하는 와인 종류와 잔 수에 따라 25~40달러,21세 이하는 와인 없이 10달러)을 사면 곤돌라가 보인다. 언덕 위 하얀 성처럼 만든 건물까지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와인 생산과정을 둘러보고 곳곳에 마련된 시음대에서 와인을 맛본다. 테라스에선 나파밸리의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리즈 리스 고객담당 매니저는 "1년에 17만5000명이 다녀간다"고 설명했다. 스털링에서 만든 와인은 지난 6년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쓰였다.
지금의 나파밸리를 있게 만든 로버트 몬다비와 로제와인으로 알려진 베린저,명품 와인인 인시그니아를 생산하는 조지프 펠프스,영화 '와인 미라클(2008년)'의 배경인 샤토 몬텔레나 등도 들를 만하다. '파리의 심판'에서 1위를 한 화이트 와인이 샤토 몬텔레나의 73년 빈티지인 샤도네다. 프랑스 샤토 무통 로칠드의 바론 필립 로칠드와 로버트 몬다비가 합작해 세운 오퍼스원은 와인만화 '신의 물방울'에 등장한 최고급 와인을 만든다.
나파밸리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은 와인트레인을 타는 것이다. 나파밸리의 중심부 40㎞를 달리며 기차 안에서 만드는 음식과 나파산 와인으로 우아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나파밸리(미국)=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
■ 여행 TIP
나파 여행은 9~10월이 적기다. 날씨가 서늘해지고 와인 제조과정도 지켜볼 수 있다. 이 시기엔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두꺼운 옷을 준비해야 한다. 오베르주 뒤 솔레유 등 호텔 리조트와 모텔이 많지만 물가수준이 높아 숙박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는 게 낫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파까지는 차로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와이너리 투어는 각 와이너리 홈페이지에서 예약하고 찾아가도 되고,현지 여행사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는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해도 된다. 교통편,입장료를 포함해 1인당 60~100달러다. 한진관광 등 국내 여행사에서 와이너리 투어가 포함된 상품도 판매한다. 나파에는 부숑(Bouchon) 레스토랑,애드 혹(Ad Hoc) 등 와인과 스테이크를 근사하게 먹을 수 있는 맛집이 많다. 고츠로드사이드(Gott's Roadside)에선 미국식 햄버거를,고피시(Go fish)에선 스시를 가볍게 즐길 수 있다. 와이너리 투어 외에 칼리스토가의 온천에서 진흙과 화산재를 이용한 머드 스파를 할 수 있으며,나파 초입에는 프리미엄 아울렛이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샌프란시스코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