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G2의 決戰, '의용군'의 추억

G2(미국 · 중국) 결전(決戰)의 분수령이 될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60주년 기념식 소동이 벌어진 직후에 열린다는 사실은 참으로 얄궂다. 요즘 국제사회를 들쑤시고 있는 통화 · 무역수지 전쟁의 한복판에 중국이 자리잡고 있듯이,'6 · 25사변'으로 시작된 60년 전의 비극을 '한국전쟁'이란 이름의 국제전으로 '완성'시킨 나라도 중국이었다.

60년 전 10월19일 중국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6 · 25사변은 기습 남침을 감행한 북한과,이를 응징하기 위한 한국 및 유엔군의 결전 구도였다. 그러나 중국 참전 이후 전쟁 구도와 이후의 한반도 현대사는 완전히 바뀌었다. 중국 '의용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중 · 북한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았고,3년 뒤 정전협정도 유엔군과 중국이 주도한 북측 연합군 사이에 체결됐다. 중국 차기 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이 지난주 열린 '항미원조(抗美援朝 · 미국과 싸워 북한을 도운) 전쟁' 기념식에서 내놓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검증은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중국은 이 전쟁에 300만명이 넘는 병력을 쏟아부었고,참전 직후 미국으로 하여금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때도 발동하지 않았던 '국가 비상사태'를 즉각 선포하게 할 정도로 기세를 올렸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참전했던 중국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비롯해 최소한 40여만명(옛 소련 집계로는 100여만명)이 목숨을 잃었고,미국 공군의 중국 본토 공습에 대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전과(戰果)는 엄청났다. 대규모 병력 파견을 대가로 스탈린의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사기술 지원을 얻어낸 것이 대표적인 예다. 보잘것없는 신생 사회주의 농업국가에 불과했던 중국은 전쟁이 끝난 뒤 최신형 미그기를 포함해 3000여대의 전투기를 거느린 세계 3위의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게다가 6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소련군의 첨단 무기를 제공받았고,연산 3600대 규모의 전투기 제조공장 건설도 지원받았다. 북한에 대해 '피를 나눈 혈맹(血盟)'이라는 명분을 각인시킨 것은 덤이었다.

첨단 군비를 생산해내는 중화학공업국가로의 도약을 꿈꾸던 중국에 6 · 25사변은 더없는 호기를 제공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게 대수는 아니었다. '의용군'으로 압록강을 넘은 중국 군인들은 대다수가 한 해 전에 끝난 '국공(國共) 전쟁'에서 공산당에 투항한 장제스(蔣介石)의 국부군 출신들이었다. 전세(戰勢)가 불리해지자 항복했을 뿐,사상적 전향을 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 '옛 적군(敵軍)'들을 총알받이로 처치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뒀다는 증언까지 나올 정도다. 내세울 것이라곤 '사람'밖에 없었던 중국이 그 '사람'을 제물로 삼아 공업국가로의 본격 발돋움을 시작하는 계기로 이용한 게 60년 전 이 땅에서의 전쟁이었다. 그 중국이 이제는 첨단 전자 · 자동차산업까지 주무르며 세계 최대 무역수지 흑자국가이자 채권(債權)국가로 환골탈태해 'G2'의 일원으로 올라섰고,글로벌 사회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 있는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뻔한 진실까지 호도하는 궤변으로는 국제사회에서 존경받을 수도,진정한 지도 국가가 될 수도 없다. 견강부회와 억지를 늘어놓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오히려 안쓰러운 이유다.

이학영 편집국 부국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