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다순구미 마을…풍랑과 맞선 투박한 삶…그래도 마음만은 따숩구나

전남 목포 (下)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살던 소박한 뱃사람들의 고향
좁고 가파른 비탈길마다 걸쭉한 인생얘기 흐르고
조선내화공장 굴뚝엔 격변의 역사 피어올라

목포 남서쪽 바닷가의 온금동 마을을 찾아간다. 우리말로는 다순구미라는 마을이다. '다순'은 '따숩다'라는 뜻이며 구미란 바닷가나 강가의 곶이 후미지게 깊숙이 들어간 곳을 말한다. 온금동은 《현대시》 2006년 1월호에 실린 한 편의 시로 나를 찾아왔다.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 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는 때이지요.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은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 마디 속에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겠는지요. '(김선태 시 '조금새끼')

말태기 고개를 넘어가자 유달산 산등성이，슬레이트와 함석지붕 집들이 첩첩이 쌓인 산동네가 고개를 내민다. 이곳이 바로 '조금새끼'들이 사는 온금동이다. 조도 · 노화도 · 암태도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뭍으로 나온 사람들이 배 타기 편리한 부둣가 산기슭에 자리잡으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앞바다엔 고하도가 가로로 길게 방파제처럼 펼쳐져 있다. 아마도 저 섬이 없었더라면 다순구미란 마을 이름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올뫼나루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1940년대에 지어진 조선내화공장 굴뚝이 지난 세월을 곱씹고 있다. 골목길에서 그물을 펼쳐놓고 깁고 있는 아낙들을 만난다. 예전에도 온금동 아낙들은 저렇게 그물 수리나 내화공장에서 벽돌 굽는 일로 생계를 도왔을 것이다. 마을 초입에는 원생이 50여명가량 된다는 또래 어린이집과 노인회관，강진 병영에서 스물 둘에 시집왔다는 명애자 할머니(74)가 53년간이나 사수(？)해온 '온금슈퍼'가 자리잡고 있다.

올뫼나루길이 바통 터치한 다순구미로를 따라 들어가자 이내 1922년에 판 마을 '공동시암'이 나타난다. 샘 우측에는 말태기 고개에서 옮겨온 '유학정인호시혜불망비'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목포는 식수가 절대 부족한 데다 수질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돈을 기부해 새 우물을 팠으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골목길은 리어카 한 대도 드나들기 어려울 만큼 비좁은 데다가 올라다니기 오살맞게 힘들게 보이는 '깔끄막'에 계단투성이다. 이런 골목을 물동이나 연탄을 담은 다라이(함지박)를 이고 이 계단들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을 이 동네 아낙들이야말로 요즘말로 '울트라 캡숑 짱'이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시멘트 길에 촘촘히 그어놓은 금이 마치 온금동 사람들 삶의 주름살 같다.

이따금 빨간 고추나 썬 호박 따위를 말리는 집들이 눈에 띈다. 이 동네 주택들은 하나같이 공간을 극대화해 쓸 줄 아는 지능형(？) 주택들이다. 삶의 남루를 조금이라도 치장하고 싶었던지 집집마다 화분 두어 개씩을 골목길에 내놓고 있다. 마을 꼭대기에 이르자 호박，배추 등 푸성귀를 심어놓은 밭 몇 뙈기가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골목들과 형형색색의 낮은 지붕들이 바다와 조화를 이룬 마을 풍경이 평화롭다.

저 푸른 바다는 아차 한 번 발을 헛디디면 미끄러지고 마는 비탈진 삶을 살아가는 온금동 사람들의 남루하고 누추한 삶을 덮어주는 한 장의 담요다. 현재 776세대，1515명이 거주하는 온금동.마을이 한창 성황을 이루던 1960，70년대보다 인구가 30%가량 줄어든 데다 이젠 배를 타는 선원도 많지 않다고 한다.

◆'조금새끼'들도 마을을 떠나고

조선내화 아래쪽 째보선창이 있었던 자리를 찾아간다. 째보선창은 1924년 올뫼나루를 매립하면서 만든 선착장이다. 바닷가 안벽이 언청이처럼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하여 째보선창이라 불렀다. 째보선창은 1981년 소년체전 때 유달산 일주도로 확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눈앞의 고하도를 바라보자 1990년 창비에서 나온 송기원 시집 《마음속 붉은 꽃잎》에 실린 시 한 편이 떠오른다. '고하도 빠져 제주도 이어지는 뱃길에/ 뚝，뚝，붓꽃 빛깔로 노을이 떨어져/ 지나치는 배들도 자위를 끊으면/ 온금동 산비탈 동네에는/ 가난한 불빛이 하나 먼저 반짝입니다. / 아내는 미술학원 강사로 밤일 나가고/ 돌맞이 어린 자식 잠든 단칸방/ 부두 잡역부 일당으로 시집을 산 젊은 문학도는/ 붓꽃 빛깔 바다가 끝내 눈이 시려워/ 온금동 달동네에 저 혼자 불빛 되어 반짝입니다. '('온금동 불빛-김시일에게')

송기원이 시를 쓸 당시 온금동엔 젊은 문학도 김시일이 살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그는 동네에서 제일 먼저 불을 켰다. 시집을 읽기 위해서였다. 우중충한 삶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순수를 지키는 청년 김시일이야말로 이 동네를 빛내는 인간 등불이었던 셈이다. 송기원의 시는 온금동이 부둥켜안고 사는 남루한 삶에 수채화보다 더 환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채색해낸다.

김선태의 시 '조금새끼'도 김선태 시인이 김시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김시일은 소설집 《불과 소금의 노래》(2004년)를 펴내는 등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시집을 읽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등불을 켤까. 아니면 시집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들한 중년이 돼 있을까.

◆사라지는 미등록 '근대문화유산'

해안로에 서서 온금동 마을을 올려다본다. 마을 위，산 중턱에 여자의 음부를 닮은 10여m 높이의 여근석이 우뚝하다. 어쩌면 저 바위도 구석기시대쯤엔 '조금새끼'를 낳았는지 모를 일이다. 1901년에 조선을 여행했던 독일 쾰른 신문사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가 일왕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를 목격했던 곳.내화공장 굴뚝 등 개항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근현대사가 겪었던 풍랑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유서 깊은 마을 온금동은 재정비 계획지역으로 지정돼 이제 곧 역사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온금동뿐 아니라 이 땅의 곳곳에서 고샅 혹은 골목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골목은 어린 시절 내밀한 삶의 추억과 따스한 기억이 담긴 공간이다. 온금동을 찾은 것도 골목이라는 삶의 뒷공간을 통해 우리시대 삶의 진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 자신이 오랫동안 삶에 대한 따스한 기억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금동 앞바다를 물들이는 붓꽃 노을을 보지 못한 채 온금동을 떠난다. 나는 조급증 때문에 평생을 베린 사람이다.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찾아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평택→당진→서천→군산→고창→무안→목포IC→초원호텔앞 우회전(영산로)→목포 해양대학 방면으로 좌회전(유달로)→보리마당 방면으로 좌회전(보리마당로)→온금동


◆추천 여행 코스

올뫼나루길→조선내화→은영식육식당→온금동 경로당→또래 어린이집→온금슈퍼(다순구미로)→공동샘(정인호 시혜불망비)→본격적인 계단→마을 꼭대기 채소밭→유달산월정사→온금경로당 좌측 포장길→여근석(산 중턱 2층 흰색 슬래브집 뒤)→해안로(옛 째보선창가).

온금동은 법정동명이며 행정동으로는 유달동에 속한다. 온금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고 싶으면 유달동 주민자치센터(061-272-3665)로 문의하시길.

◆맛집

목포 하당 부영아파트 5차 회센터 4거리 명동보리밥·보쌈(061-285-1113)은 청국장과 되비지(콩비지)가 맛있는 집이다. 각종 한방재료와 국내산 암퇘지만 사용한 보쌈이 일품이다. 보리밥정식 6000원，보쌈 2만3000원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