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조작ㆍ횡령 '범죄 수익' 환수 사실상 全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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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97건 중 2건만 몰수 판결지난달 29일 서울중앙지법 423호 법정.이곳에선 주가조작,횡령 등의 범죄를 저지른 일당에 대한 선고공판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300억원이 넘는 돈을 횡령한 업체 대표 박모씨와 불과 한 달간 주가조작 자금을 빌려주고 30%의 고리를 받아 수십억원을 챙긴 사채업자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날 재판에서 몰수나 추징 선고는 없었다. 이들은 출소 후 숨겨 놓은 범죄 수익금으로 호화생활이 가능해진 셈이다.
법원-검찰, 책임 떠넘기기
강제환수 대상서도 빠져있어
재산 숨기면 피해 보전 막막
주가조작,횡령 등 대규모 경제범죄가 줄줄이 터지고 있지만 몰수 · 추징 등 금전적 처벌은 사실상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17일 한국경제신문이 올해 전국의 법원이 선고한 주가조작사건 24건(병합선고된 사건 포함)과 서울중앙지법이 선고한 횡령 173건 등 197건을 분석한 결과 몰수나 추징이 선고된 것은 주가조작사건 2건에 불과했다. ◆법원 · 검찰,나 몰라라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검사가 몰수 구형을 하지 않으면 법원은 몰수 · 추징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 법원이 나서서 은닉재산을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얘기다. 박씨 사건의 수사를 맡은 검찰 관계자는 "범죄수익환수반에서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범죄수익 환수반 관계자는 "몰수 구형은 공판부에서 하는 것"이라고 책임을 돌렸다. 공판부 관계자는 "수사팀이 (은닉재산 목록 등을) 안 넘겨주는데 무슨 수로 찾나"라고 말했다.
법원과 검찰이 이처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몰수 · 추징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명시돼 있지 않아서다. 형법과 범죄수익환수에 관한 법률 등에는 마약,뇌물 범죄 수익은 '몰수한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특정경제범죄처벌에 관한 법률 등에는 '몰수할 수 있다'고만 돼 있다. 몰수 · 추징을 하지 않아도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닌 셈이다. ◆범죄자는 웃는다
하지만 피해자 개인이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배상명령을 청구하거나 민사소송을 걸어 피해를 배상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법원이 배상명령을 인용한 것은 1346건으로,기각된 2625건의 절반 수준이다. 게다가 배상명령을 받거나 민사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개인이 범인의 재산을 찾기란 어렵다. 채권추심업체 고려신용정보 관계자는 "사기 등 범죄 피해자가 범인의 재산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해서 재산을 추적해 봐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1차적으로 범죄수익을 찾아낼 의무가 있는 수사검사는 범죄수사와 공소유지를 하는 것도 벅차다는 입장이다. 또 범죄수익환수반 반장은 특수부,첨단수사부 등의 부장검사가 겸직으로 맡고 있고 소수의 직원이 배치돼 있을 뿐이다. 따라서 범죄자들이 꽁꽁 숨긴 재산을 제대로 추적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법률상으로 해도 그만,안 해도 그만인 몰수 · 추징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 셈이다.
◆낡은 법을 고쳐라
검찰이 범죄수익을 찾아낸다 해도 문제는 발생한다. 범인 재산을 묶어두는 보전처분을 신속하게 해야 하지만 범인의 금융계좌에 대한 보전처분 신청이 번번히 기각되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부 출신 윤종성 변호사는 "횡령,주가조작 등의 사건은 자금흐름을 포착해 몰수대상을 특정하는 것 자체가 매우 까다롭다"며 "힘들게 범죄수익계좌를 포착해 보전신청을 해도 법원이 몰수의 범위를 좁게 보고 기각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1953년에 제정돼 반세기 넘게 보완되지 않은 형법 몰수조항이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현행 몰수조항상 범인의 계좌에 범죄수익금 10억원이 있다 해도 다른 돈 5000만원이 섞이면 몰수대상을 특정하기 어렵다.
강우예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과 영국,독일 등 선진국은 금융계좌의 자금이 범죄수익이라는 점에 대한 검사의 입증책임을 완화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범죄수익을 환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