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직원 "잔업ㆍ특근도 OK"… 하이닉스 '한국화 전략'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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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시공장 성공 비결은'一起工作 一起吃飯 一起喝酒(함께 일하고 밥먹고 술마시자)'
"일도 밥도 술도 함께 하자"
'현지화' 대신 한국문화 이식, 생산성 본사 추월 '이변'도
중국 장쑤성 우시의 하이닉스반도체 공장.현관에 들어서자 정면에 붙어 있는 큰 현판이 첫눈에 들어왔다. "하이닉스 중국 공장의 성공비결이 담겨 있는 글귀입니다. "(이재우 하이닉스 중국법인장)우시공장은 단 10개월 만에 공장 완공,1년 만에 흑자실현,최단기 세계시장 점유율 10% 달성 등 반도체 업계에서 남다른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이 법인장은 이 공장의 성공 키워드로 '한국화'를 들었다. 잔업이나 특근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고,개인적 취향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공동체' 문화를 이식함으로써 높은 생산성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시공장은 하이닉스가 위기를 딛고 세계적 D램 회사의 명성을 유지하는 발판 역할을 한 사업장이다. 한국화,엔지니어의 헌신,파트너 전략 등 3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좋은 파트너를 선택하라
우시공장 전시관 한가운데에는 이곳을 방문한 중국 고위 관료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원자바오 총리,자칭린 중국 정협 주석,시진핑 국가부주석,리커창 상무부총리,우방궈 전인대 위원장 등이다. 9명의 중국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중 5명이 이곳을 찾은 셈이다. 이 법인장은 "중국 지분이 전혀 없는 공장을 고위 관료가 이렇게 많이 찾은 경우는 찾기 힘들 것"이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2003년 하이닉스는 중국의 공장 건설 후보도시 12곳 중에서 우시를 택했다. 당시 중국공장건설 태스크포스 팀장이었던 권오철 사장은 "우시는 당시 반도체 사업을 이미 경험하고 있어 다른 곳에 비해 산업에 대한 이해가 가장 높았다는 점을 보고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우시에서는 하이닉스가 들어가기 전부터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공장을 돌리고 있었다. 또 우시 정부는 부지제공,공장건설,금융알선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면서 성공의 파트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초기 투자비용 20억달러 가운데 하이닉스가 낸 현금은 3억달러였고,나머지는 중국은행(차입)과 ST마이크로 등 파트너들이 댔다.
◆속도전이 핵심 경쟁력
발걸음을 생산라인으로 옮겼다. 본사인 이천공장보다 훨씬 깨끗해 보이는 라인이었다. 이 법인장은 "한국과 중국인이 함께 근무하지만 본사보다 생산성(수율)이 높아 질시의 대상이 됐던 설비"라고 설명했다. 이천에서 생산에 성공한 제품의 설계도를 중국에 가져와 생산했는데,생산성이 더 높았다는 것이었다. 한국화의 결과였다. 하이닉스는 공장 설립 초기인 2005년 600명이 넘는 인원을 중국현장으로 파견했다. 이 중에는 노조원도 200명이나 있었지만 회사 회생을 위해 기꺼이 중국행을 받아들였다. 이 법인장은 "중국 공장의 성패는 낮은 인건비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라인을 제대로 옮겨놓는 것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 적중했다"고 말했다.
600명의 인력은 공장 건설과 장비 투입에 매달렸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얘기했지만 하이닉스는 약속대로 공장기공 10개월 만에 제품생산에 성공했다. 그러자 현지인들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현지 직원들에게는 낯선 잔업 특근에 동참하기 시작했고,공정개선 아이디어도 적극적으로 내게 됐다.
이 공장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건물은 기숙사와 식당이다. 중국에서는 드물게 기숙사를 짓고 노래방,영화관,PC방 등의 시설까지 갖췄다. 중국 관료들까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고 할 정도로 사원 복지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이 법인장은 "한국 사람들처럼 일하게 하려면 똑같이 대우해주는 게 기본 방침"이라고 말했다. 권오철 사장은 중국법인에 대해 "중국법인을 만들지 않았다면 규모의 경제 달성이 불가능해 오늘의 하이닉스는 없었을 것"이라고 우시 공장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우시(중국)=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