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대통령은 제2 담화문 준비해야

北 도발 맞서 국민불안 해소 미진
구체적 응징책 담을 때 신뢰 얻어
중국 한나라 문제(文帝) 때 일이다. 북방의 흉노가 국경을 넘어와 수시로 노략질을 했으나 조정의 신하들은 태평세월 운운하며 흉노를 달래는 데 급급했다. 해마다 황금,솜,채색한 비단을 보내주니 우쭐한 흉노의 기세는 더 드세졌을 뿐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때 가의(賈誼)가 나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천자가 공손하게 공물을 바치고 이적(夷狄)이 이를 거두며 호령하니 발이 오히려 위를 차지하고 머리가 도리어 아래로 간 형국이라 개탄했다. 그리곤 이런 '비굴하고 치욕스러운' 형세를 나 몰라라 하며 작은 즐거움에 빠져 있지 말고 군사를 일으켜 일개 현(縣)의 무리밖에 되지 않는 적을 당장 응징할 것을 청했다.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의 연평도 도발에 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은 민간인까지 무차별 살상한 북한의 행위를 반인륜적 범죄로 규정하는 한편,어떠한 위협과 도발에도 맞서는 용기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역설했다. 2000여년 전 중국의 가의가 꿰뚫어본 역사의 진리다. 문제는 온 국민이 일치단결해 안보에 매진하자는 대통령의 호소가 얼마나 국민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국민들이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으며,대학가 게시판에까지 올라왔던 전쟁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효과가 아직은 살아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내용이야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이지만 어딘가 허전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저명한 담화 분석가였던 케네스 버크는 어떤 담화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행위자,행위,목적,수단,상황 등 다섯 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배합돼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를 연평도 도발에 관한 대통령 담화에 적용하면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며,누가 무슨 수단을 사용해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어떤 목적을 이루겠다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대통령 담화에서 빠지거나 부족해 보이는 요소는 '행위'와 '수단',그리고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다.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는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을 살펴보면 적을 응징할 행위와 수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다. 1962년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발표된 존 F 케네디의 연설은 쿠바로 향하는 모든 공격용 무기의 수송을 금지할 것이고,쿠바의 군사력 증강을 무력으로 저지할 것이며,쿠바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면 그것이 어디를 향하더라도 이를 미국에 대한 소련의 공격으로 간주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국민들에게는 모든 위협을 해소할 때까지 수개월만 인내해달라고 당부한 것은 상황에 대한 언급이다.

2001년 뉴욕 심장부의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진 뒤 조지 W 부시가 의회에서 행한 연설도 마찬가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해 알 카에다 지도자들을 미국에 인도할 것,억류 외국인들을 모두 석방할 것,테러리스트 훈련 시설을 폐쇄할 것을 요구하고 불응하면 무자비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국토안전부를 창설하고 미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의 경찰력,정보부서,은행들에도 협력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부시의 이 연설은 사건이 발생한 지 9일 후에 행해진 것이고 9월11일 당일 저녁에 발표된 첫번째 담화에는 당혹감과 통절함이 있었을 뿐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정리가 덜 된 탓이었다.

우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통령은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는 국민들을 위해 제2의 담화문을 발표해야 할 시점이다. 보다 결연하고 보다 구체적인 대응책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어야 국민들이 정부와 군을 믿고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