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인물열전] (29) 범저(范雎), 오줌 세례 치욕 참으며 살아남아 재상 자리에 올라

세상을 살다보면 의도와 관계없이 위기를 겪을 때가 있다. 역사속의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살아남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은 의외로 많지 않다.

범저(范雎)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叔)이다. 그는 유세할 제후를 물색하다가 위나라 왕에게 유세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돈이 없어 위나라 중대부(中大夫) 수고(須賈)를 먼저 섬기게 됐다. 수고는 위나라 소왕(昭王)과 친해 간혹 사자로 이웃 나라에 파견됐다. 그가 제나라에 파견될 때 범저도 따라 나섰지만 몇 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어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법.동방의 전통강국 제나라의 양왕(襄王)은 범저가 유세와 변론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금과 쇠고기,술을 보내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했다. 무심결에 선물을 받은 범저는 의심 많은 수고에게 이 사실을 들키게 된다. 수고는 범저에게 쇠고기와 술만 받고 금은 되돌려주도록 하면서 내심 범저가 위나라의 비밀을 제나라에 알려주었기 때문에 이런 선물을 받게 된 것이라고 의심,위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한 명인 재상 위제(魏齊)에게 고자질했다.

그러자 위제는 불같이 역정을 내면서 사람들을 시켜 범저를 두들겨 패게 했다. 갈비뼈와 이가 부러져 죽을 지경이었던 범저는 대나무 발에 둘둘 말려 변소에 내팽개쳐졌다.

위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부러 범저에게 갖은 모욕을 줘 배신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퍼뜨리게 하는 동시에 나라의 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이렇게 다스리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변소에 버려진 그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겠기에 자신을 지키고 있는 자에게 거금을 주겠다며 매수했다. 그러자 범저를 지키던 자가 위제에게 달려가 범저가 이미 죽은 것 같으니 내다버리겠다고 했고,범저는 술에 취한 위제의 눈을 속이고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위나라 사람 정안평(鄭安平)이 이 소문을 듣고 범저를 데리고 달아나 함께 숨어 살았다. 범저는 성과 이름을 바꿔 장록(張祿)이라 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는 서쪽의 신흥 강국 진나라 사신 왕계를 따라 다시 진나라로 들어갔다가 실력자 양후에게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뛰어난 언변과 책략으로 진나라 소왕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범저는 소왕을 도와 36년간이나 끌어온 외척정치를 청산하게 만드는 계책을 내고,다시 촉과 한중을 연결하는 잔도를 1000리나 개척해 천하 사람들이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또 조나라 군대 40만명을 일거에 무찔러 다른 6국이 합종을 거론할 생각도 못하게 만든 후 재상에 올랐다. 다른 나라 출신으로 객경(客卿)인 그가 진나라 토착 세력들의 끊임없는 견제 속에서도 소왕의 그림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뜻밖의 인물이 찾아온다. 과거 자신을 위제에게 고자질해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만든 수고였다. 수고가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 속죄해도 오히려 부족하다"며 자신의 죄를 빌자 범저는 과거의 치욕을 되새기면서 이같이 말한다.

"네 죄목은 세 가지다. 너는 예전에 내가 제나라와 내통한다고 여겨 나를 위제에게 모함했으니,이것이 너의 첫 번째 죄다. 위제가 나를 욕보이기 위해 변소에 두었을 때 너는 그것을 말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다. 위제의 빈객들이 취해 번갈아가며 나에게 소변을 보았으나 너는 모르는 척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다. 그러나 나는 너를 용서하겠다. "('범저채택열전')이후 범저는 친구 채택이 찾아와 '멈춤의 지혜'를 터득하라고 조언하자 재상자리에서 내려와 은둔하면서 생을 마쳤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