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밥도둑 굴비로 배 채우고…법성포 해안 거닐며 상념 비우다

● 전남 영광 (下)

"비굴하지 않겠다, 그래서 굴비다"
귀양살이 이자겸의 목소리 들리는 듯

조선시대에 영광은 '옥당골'이라 불렸다. 정이품 당상관의 자제가 첫 부임지로 이곳을 거치면 옥당(홍문관)으로 영전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아들을 낳아 원님으로 보내려면 옥당골로 보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굴비의 고장 '옥당골' 법성포로 간다. 조선시대만 해도 서해안에서 가장 큰 항구였던 법성포는 조기를 잡으러 칠산 앞바다로 나가는 뱃사람들이 식구미를 보충하거나 그물 손질을 하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관문이었다. 옛 포구로 입항하는 첫머리였던 작은 목냉기(소항월마을)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예전에 조기 파시가 열렸던 마을이다. 선원들이 조기 파시에서 번 돈을 이 마을 색주가에서 죄다 털리고 말아 목(고비)을 넘어가기 어렵다 해서 목냉기라 불렀다.

"목냉기 갈보야 몸단장을 말어라/ 아까운 내 청춘이 다 늙어간다/ 목냉기 갈보야 몸치장 말어라/ 돈 없는 내 청춘이 다 늙어간다. "◆굴비의 본고장 '옥당골' 법성포

그러나 이젠 목냉기는 여남은 척의 고깃배들이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한가한 어촌일 뿐이다. 목냉기를 지나 법성진 숲쟁이(명승 제22호)로 향한다. '쟁이'란 재,즉 성(城)이라는 뜻이니 '숲쟁이'란 숲으로 된 성이다. 숲쟁이에는 산 능선을 따라 늙은 느티나무들이 약 300m에 걸쳐 이룬 숲이 있다. 법성포구가 일목요연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이 숲은 방풍림의 역할과 함께 단오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한때는 조기 말리는 덕석 수백 개가 널려 있었다는 법성포구는 한산하기 짝이 없다. 조선시대엔 조창이 있어 해상 물류기지 역할도 했던 법성포가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육상 운송이 발달하기 시작한 선말부터였다. 거기에 와탄천과 대산천에서 흘러든 토사가 쌓이고 해저가 융기하는 바람에 수심이 얕아져 작은 어선조차 입항하기 어려워진 포구의 자연환경이 쇠락을 재촉한 것이다. 파도 치는 포구의 모습이 아름답다 해서 다랑가지(多浪佳地)라고 했던 일은 꿈 같은 옛날이 돼 버렸다. 그래도 포구의 길가에는 굴비 가게가 즐비하다. 영광군 내 굴비 가게 500개 가운데 400여곳이 이곳에 밀집해 있다 한다. 간혹 TV홈쇼핑에서 보았던 가게들도 눈에 띈다. 가게 앞 걸대에 줄줄이 매달아 놓은 굴비 두름들이 오브제 같다. 옛날보다 쇠락하긴 했지만 법성포는 여전히 굴비의 고장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광굴비의 비결은 '섭장'

굴비는 농어목 민어과에 속하는 참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이다. 회유성 어류인 조기는 흑산도 근해에서 겨울을 보내고 곡우(양력 4월20일께) 때면 칠산바다와 위도를 지나 연평도까지 북상한다. 그 무렵에 잡은 알이 꽉 찬 참조기를 말린 것을 '곡우살 굴비' 또는 '오가재비 굴비'라 하여 최고로 친다. 굴비란 이름이 붙은 건 고려 인종 때 영광에 귀양온 이자겸이 '비굴(卑屈)하게 살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조기를 진상하면서 굴비(屈卑)라 이름 붙여 올려보낸 데서 유래했다던가. 그러나 '진상'이 전형적인 로비의 형식임을 감안하면 그의 굴비에서 비굴의 냄새를 완벽하게 지울 수 없다. 요즈음의 영광굴비는 칠산바다에서 잡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광의 햇빛,바닷바람,습도 속에서 건조한 것이면 다 영광굴비로 친다. 법성포가 굴비의 고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칠산바다가 가깝기도 하지만 풍부한 영양염류와 밤과 낮의 습도 차가 커 조기를 말리는 데 천혜의 기후 조건을 지녔기 때문이다. 1년 이상 간수가 빠진 천일염으로 조기를 염장한 뒤 차곡차곡 쌓아 가마니로 덮고 눌러 놓은 뒤 사흘 후 짚으로 엮어서 걸대에 걸어 법성포 해풍에 말린 다음 통보리 속에 저장하는 섭장 방식도 영광굴비의 명성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서울같이 흥청거렸던 칠산바다 조기 파시

법성포를 떠나 국도 77호선을 연결하는 군도 14호선에 있는 18㎞ 백수해안도로를 탄다. 굽이굽이 백수해안도로로 접어들자 물빛이 흐릿한 황해바다가 전개되고 드넓은 모래갯벌과 개펄이 교대로 나타난다. 물 빠진 갯벌은 갯골이 유난히 깊고 개펄엔 칠면초만 무성하다. 갯벌의 삭막한 자아가 내 영혼의 금선(琴線)을 건드린다. 삭막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내 버릇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하구나. 거북바위와 모자바위,고두섬 등 해안에 딸린 절경이 갯벌의 삭막한 자아 속에 핀 한 송이 꽃 같다. 법성포가 빤히 건너다보이고 팔 뻗으면 바다 건너편 '불교초전지' 좌우두가 잡힐 듯하다. 마침내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 어장인 칠산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올망졸망한 7개의 섬이 모여 있는 '사흘칠산' 칠산도가 수평선 끝에서 가물거린다. 사흘 동안 번 돈으로 1년을 먹고산다 해서 '사흘칠산'이다. 알밴 참조기를 잡을 수 있는 곡우 무렵,칠산바다의 풍랑이 사납기라도 하면 참조기 잡이를 사흘밖에 하지 못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칠산도 파시전에 대해 '군 북쪽 20리에 있는데,조기가 생산된다. 매년 봄에 온 나라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판매하는데,서울 저자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 고깃배들은 모두 세를 낸다'고 적고 있다.

칠산도의 실루엣이 뚜렷해질 즈음 지난해 개관한 노을전시관에 닿는다. 전시관 2층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칠산도를 바라보노라니 '돈 실러 가세,돈 실러 가세,칠산바다 돈 실러 가세~' 어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돈다.

◆'누운 섬'에서 '눈섬'으로

백수해안도로를 벗어나 염산 가는 길로 접어든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이 펼쳐지는가 했더니 이내 바둑판 같은 염전들이 나타난다. 전국 천일염의 10%가 이곳에서 난다고 한다. 염산면의 끝자락에는 1934년께 섬에서 육지로 탈바꿈한 작고 소박한 항구 설도항이 있다.

예전에는 '누운 섬(臥島)'이었으나 혀 짧은 사람들에 의해 '눈섬(雪島)'이 돼버린 곳이다. 부둣가에는 황석어젓,멸치젓,짜랭이젓(병치새끼젓),갈치속젓,까나리액젓 등 다양한 젓갈을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다. 이곳 상인들은 질 좋은 천일염으로 담은 이 젓갈들이 전북 곰소의 젓갈보다 낫다고 자부한다. 보리새우,낙지,꽃게 등 생물과 백합,물메기,서대,쫄쫄이 미역 등이 설도항 토요장터의 주인공들이다. 바닷속 끝없는 유목을 끝낸 보리새우들이 함지박 속에서 마지막 생을 즐기고 있다. 그까짓 것도 무슨 여생이라고.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찾아가는길

서해안고속도로→평택→당진→서천→군산→고창→영광 IC→영광→단주 사거리에서 백수읍 방면으로 우회전→신평교차로에서 법성포 방면으로 우회전→법성포


◆여행 팁

영광 법성포 굴비특품사업단에선 지역 특산품인 영광법성포 굴비를 홍보하기 위해 관광객을 대상으로 굴비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체험내용은 굴비 해동하기→선별→간질하기→엮기→담그기→건조하기→굴비(고추장 굴비,굴비구이) 시식하기.굴비특품사업단(061)356-5657 홈페이지(bongulbi.com)

백합이나 맛조개를 캐면서 갯벌체험을 하고 싶다면 염산면 두우리 어촌체험마을을 찾아가면 된다. 두우리 갯벌은 시속 70㎞로 자동차를 달려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두우리 갯벌 근처에 두우리 해수욕장이 있다. 백바위와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의 물보라를 보며 철 지난 바닷가를 거니는 것도 색다른 기분이다. 011-636-4303 홈페이지(dangdu.seantour.org)


◆맛집복효근 시인은 '굴비'라는 시에서 '분명 비린내에도 품계는 있다/ 내 살점 뜯으며 생각하라/ 살아서 비굴(卑屈)하겠느냐/ 죽어서 굴비(屈卑)하겠느냐' 묻는다. 굴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인 명제를 던져주는 생선이다.

법성포 포구 삼거리 007식당(061-356-2216)에 가면 신선하고 맛깔스러운 반찬이 가득한 굴비정식을 맛볼 수 있다. 아마도 숟가락이 철학적 명제 따위를 떠올릴 틈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굴비백반을 주문하면 스무 가지가 넘는 반찬과 양념게장,병어조림,장대찌개가 줄줄이 나온다. 굴비정식 1인분에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