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노숙인 저축왕

"당신이 5실링을 저축하는 건 누군가의 하루 일거리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다. "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1년 한 말이다. 저축이 개인에겐 꼭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지만 경제 전반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소비가 줄고 그로 인해 생산이 감소하면 실업자가 늘면서 불황이 올 수 있다는 논리다. 이를 '저축의 패러독스'라고 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근면 저축'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가 뼈빠지게 일해서 저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내용으로 패러디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개미는 1차 산업 노동자인 반면 베짱이는 서비스업에 종사해 더 많은 돈을 번다는 식이다. 아무리 애써 저축해도 부동산값 상승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우스개도 있다. 개미는 늘 열심히 일하는 반면 비슷한 또래의 베짱이는 엄마가 사준 집에서 놀기만 했다. 개미는 3년 동안 3000만원을 모은 데 그친 반면 베짱이는 집값이 3억원이나 올랐단다. 그렇다고 해서 저축의 가치가 낮아지는 건 아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사회 초년생이 기댈 곳은 저축밖에 없다. 사업이나 투자 밑천 마련도 결국 저축에서 출발한다. 통장에 한푼 두푼 쌓이는 걸 보며 생활의 틀을 건전하게 유지하는 건 저축이 가져다주는 덤이다. 베짱이가 집값 오르는 것만 믿고 빈둥거리다가 한량으로 생을 허비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경기광역자활센터의 올해 노숙인 저축왕으로 10여 년간 길거리 생활을 하던 50대 남자가 뽑혔다고 한다. 수원 리-스타트 사업단에서 자활근로를 하고 있는 강모씨가 주인공이다. 지난 2년6개월간 그가 모은 돈은 2200여만원.전자와 자동차 부품 조립으로 받는 돈이 월 80여만원이란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액수다. 자활근로는 주 5일이라 주말엔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며 악착같이 벌었다.

사업실패로 빚더미에 올라 앉았던 알코올중독 노숙자가 맘을 고쳐먹고 일터에 나선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에게 저축은 단순히 돈 모으기를 넘어 자신과 사회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일이었을 게다. 아직은 신용불량에서 벗어나고 나빠진 건강도 추스려야 하지만 희망이 있기에 끝까지 버텨나갈 거란다. 자활에 대한 그의 소신은 이랬다. "자신의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늦었다고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기할 수 있습니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