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봉 대신증권 창업자 별세…말단 행원서 종합금융그룹 일군 증권계 큰 별

증권계의 큰 별이 졌다. 9일 향년 85세로 별세한 '부도옹(不倒翁 · 오뚝이)' 양재봉 대신증권 명예회장은 증권업계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대신증권을 창업해 대기업 그룹 계열 증권사들과 경쟁하며 대형 증권사로 키운 그의 일생은 증권계의 역사와 영욕을 함께했다.

양 명예회장은 1925년 전남 나주 송촌리에서 농부인 양홍철씨의 2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입행,금융계와 긴 인연을 맺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고교 동기다. 해방 후 조선은행을 나온 그는 미곡상 양조장 등을 경영하며 전남대 상학과를 1955년 졸업,만학의 꿈을 이뤘다. 1960년 다시 한일은행에 들어가 청량리지점장 시절 9억원이던 지점 수신액을 1년반 만에 네 배로 불려 은행가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3년 임대홍 전 미원그룹 회장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했으나 정부의 자본시장 육성 의지에 착안,증권회사 설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각종 규제로 신규 설립이 어렵자 기존 증권사 인수에 나서 1975년 자본금 3억원의 중보증권을 인수했다.

인수 직후 '금융업은 신용이 생명'이라는 신조 아래 사명을 '대신(大信)'으로 바꿨다. 정부의 증권사 대형화 계획에 맞춰 대신증권도 자본금을 20억원으로 늘리며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창업 당시 1.9%에 불과했던 시장점유율을 1977년 증권업계 2위인 9%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때 터진 '박황 사건'은 큰 시련을 안겨줬다. 영업부장이던 박씨가 고객 돈 수십억원을 횡령한 대형 금융사고를 낸 탓에 쫓겨나듯 사장에서 물러났다. 양 명예회장 집에는 당시 투자자들에게 끌려다니다 찢긴 와이셔츠가 아직도 걸려 있다고 한다.

3년간 돼지를 기르며 와신상담하던 그는 오뚝이처럼 재기한다. 1981년 자본금을 까먹을 정도로 망가진 대신증권의 주주들이 그를 경영 일선에 복귀시킨 것.그는 1980년대 증시 활황에 힘입어 사세 확장에 나섰다. 온갖 고초 끝에 회사를 정상화시켜 붙은 별명이 '부도옹'이다. 1984년 대신경제연구소,1986년 대신개발금융,1987년 대신전산센터,1988년 대신투자자문,1989년 대신생명보험,1990년 송촌문화재단 등을 잇달아 설립해 오늘의 대신금융그룹을 일궜다. 그는 증권회사의 본질은 기업 자금조달에 있다고 판단,채권 인수시장과 기업공개 시장을 선점했다. '기업공개를 하려면 대신으로 가라'는 말까지 유행했을 정도다. 또 미래 금융사업은 전산 발전과 병행할 것을 예견,1976년 업계 최초로 증권 전산화에 나섰고 1979년에는 각 지점에 전광시세판을 들여놨다. 1980년대 후반 주식 붐이 한창일 때 각 증권사 지점에 고객들이 모여 시세판을 보던 풍경은 대신증권에서 시작됐다.

1997년 터진 외환위기는 양 명예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계기가 됐다. 그는 1995년부터 보유 자산을 처분해 단기차입금을 모두 갚고 무차입 경영에 들어갔다. 2년 뒤 외환위기로 5대 증권사 중 네 곳이 문을 닫거나 주인이 바뀌었지만 대신증권은 무사했다.

양 명예회장은 2001년 현업에서 물러나 지금은 고인이 된 차남 양회문 전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줬다. 은퇴 후에는 송촌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사업,사회복지시설지원사업 등 사회공헌 활동을 펴왔다. 유족으로는 장녀 영애씨와 사위 나영호 전 대신경제연구소 사장,장남 양회천 전 광주방송 회장,둘째 며느리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과 손자 양홍석 대신증권 부사장,차녀 회금씨와 사위 노정남 대신증권 사장,3남 양용호 대신에셋 회장,3녀 미경씨와 사위 이시영 중앙대 교수,4녀 회경씨와 사위 이재원 대신정보통신 사장,4남 양정현 대신정보통신 부사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영결미사는 11일 오전 8시 명동성당.(02)3010-2230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