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후진타오가 강희제를 '롤모델' 삼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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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평전|장자오청·왕리건 지음|이은자 옮김|민음사|744쪽|3만5000원여덟 살에 즉위한 황제는 할머니인 효장문황후와 네 명의 성이 다른 대신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통치권을 행사했다. 네 명의 대신은 정무를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대행했다. 그 중에서도 오배는 황제의 뜻을 거스르며 거짓 조서로 정적을 제거할 만큼 오만했다.
여덞살에 즉위해 61년 태평성대
강력한 외교·통합의 내치 선보여
친정을 시작한 지 2년도 되지 않은 1669년.16세의 황제는 아직 오배를 상대하기엔 힘이 부쳤지만 한편의 기막힌 드라마를 연출했다. 오배를 속이기 위해 스스로 재능을 감추고 정사에는 뜻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황제가 젊고 건장한 시위들을 선발해 날마다 이들과 어울리자 오배는 경계심을 풀고 주위에 사람을 대동하지 않은 채 황제를 알현했다. 시위들은 곧바로 그를 체포했다. 직접 오배의 무리들을 국문한 황제는 이들을 대부분 사형에 처했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나 중대한 죄행이 없는 오배의 친척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을 물리치고 관대하게 처리했다. 어린 황제의 지혜와 신중함,용감함과 정직성에 사람들이 탄복한 것은 물론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히는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이야기다. 1661년부터 1722년까지 61년간 중국을 다스린 강희제는 이른바 강희 · 옹정 · 건륭의 세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 이어진 태평성세를 뜻하는 강건성세(康乾盛世)의 서막을 열었다. 현재 중국 영토도 강희제와 옹정제,건륭제의 치세를 거치면서 완성된 것으로,강희제가 각 부족의 정치적 · 군사적 위협을 명민한 지략으로 하나하나 극복하며 강력한 통치권을 확보한 결과였다.
《강희제 평전》은 중국 샤먼(厦門)대 역사학과 장자오청 · 왕리건 교수가 사료를 바탕으로 즉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강희제의 일생을 꼼꼼하게 되살려낸 책이다. 책의 전반부는 강희제의 유년 시절부터 즉위 이후 정권을 확보해가는 과정을,후반부는 내치의 업적을 담았다. 책 전반에 강희제의 문무를 겸비한 강희제의 지략과 탁월한 식견이 드러나 있다. 청 왕조가 국내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한 상가희,경중명,오삼계의 삼번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군벌로 성장해 왕조에 큰 위협이 됐다. 삼번의 폐해를 일찌감치 간파한 강희제는 8년간의 지난한 전쟁 끝에 이들을 진압했다. 2년 후에는 정씨 일가가 지배하던 대만까지 점령했고,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몽고에 직접 출병해 정복했다. 티베트에 대한 지배력도 강화해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세력 판도를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강희제는 유화책과 강경책을 함께 구사하면서 힘을 키우고 국가를 확장해갔다. 안으로는 경제와 민생을 챙기고 각종 제도를 확립하며 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했다.
중국사 최고의 성세를 구가한 강희제로부터 오늘날 위정자와 조직의 리더들은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저자들은 대통합의 리더십과 민생 우선의 정치,철저한 공직 윤리 확립,전문적인 인재 선발,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한 황하와 회수의 치수(治水),이교도를 존중하고 서양의 앞선 기술을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개방적 태도 등을 꼽고 있다. 만주족과 몽고족,한족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강희제는 그 자신이 통합의 상징이었다. 그는 사냥을 즐기며 학문에도 매진해 만주족의 유목민적 기백에 한족의 문화전통을 겸비했다. 또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생업을 즐겁게 여기도록 하는 안민(安民)을 정치의 최고 덕목으로 여겼다.
그래서 국가 소유의 황무지를 민간에 넘겨 개간을 독려했다. 한족의 빈곤한 농민이 만주족 귀족의 노예가 되는 것을 금하여 자영농을 육성하는 동시에 한족과 만주족 사이의 갈등을 완화한 것은 통합의 리더십과 민생 우선의 철학을 보여주는 사례다. 조정 관리에 대한 상벌을 분명히 하고 학문을 장려한 이학치국(理學治國),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인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강희제의 진면목을 보고 나면 최근 중국의 지도자들이 왜 그를 배우려 애쓰는지 알게 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