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 기행] 밀밭과 하늘을 잇는 퐁투아즈…빛으로 하나된 자연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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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피사로의 '퐁투아즈 마튀렝의 호밀밭'파리만큼 방 구하기 어려운 곳도 드물 것이다. 인구는 자꾸 늘어나는데 주거지는 한정돼 있어 새로 정착하려는 사람들의 고통은 점점 더 가중되고 있다. 유학 초기 파리에 자리잡을 때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치안이 좋지 않은 북부지역을 제외하고 시내나 교외를 가릴 것 없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집이 쉽사리 얻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예 한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에 기거하면서 매일매일 다리품을 팔며 부동산업소를 순례했다. 비싼 집은 더러 있었지만 적당한 가격대의 방을 찾기는 힘들었다.
세잔·고갱·도비니…
전원 속 둥지 튼 가난한 화가들…19세기 인상주의 화풍 꽃피워
짧은 붓질·절제된 감정…독특한 빛과 색의 조화 담아내
그렇게 석 달이 지났다.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지인이 북부 교외지역이라도 둘러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공부하러 왔다가 정작 공부는 못하고 집 구하는 데 온 정력을 낭비하고 있던 나로서도 착잡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그 길로 RER(파리와 교외를 연결하는 고속전철)을 타고 퐁투아즈로 향했다. 퐁투아즈는 아프리카 및 아랍계 이주 노동자 밀집지역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범죄발생률 1,2위를 다투는 우범지역.유학생들도 거주를 꺼리는 지역이었다. 파리의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이주민들이 이곳으로 흘러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고 생계를 꾸리기 힘들다 보니 절도,강도 사건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도 파리의 집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한 화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카미유 피사로가 처음 자리를 잡은 후 세잔,고갱,도비니 등 인상주의 미술의 주도자들이 이곳 퐁투아즈 레르미타주에 둥지를 틀었다. 자살 직전의 고흐 역시 근처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물렀다.
이들이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인상주의의 이념을 구현하기에 전원 풍경화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집세문제도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사로는 나중에 그마저도 감당할 수 없어 더 싼 집을 찾아 퐁투아즈 외곽의 오스니로 물러났다.
피사로는 인상주의자들의 스승으로 자신이 발견한 빛의 기법을 후배들에게 전수했다. 서인도 제도에서 프랑스 국적의 포르투갈계 유대인 아버지와 크레올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피사로는 복잡한 혼혈적 특성으로 인해 평생 고독한 존재로 살았다. 그가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에 공감한 점이라든가,농촌에서 반 은둔적으로 산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세잔,고갱,드가 같은 괴팍하고 비타협적인 인물들을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이념 아래 결속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고집불통의 세잔이 피사로를 "겸손하며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했을 정도니 그의 오지랖이 얼마나 넓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인상주의자들이 여덟 차례의 그룹전을 가진 끝에 마침내 대중에게 인정받게 된 것은 모네를 비롯한 멤버들의 의욕적인 활동에 힘입은 바 크지만 피사로의 화합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일회적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인상주의는 아카데미 화가들의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고 주제와 기법면에서 혁신을 모색한 젊은 화가들을 주축으로 1860년대 탄생했다. 인상주의자들은 동시대의 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색채가 사물의 본원적이고 지속적인 성질이 아니라 날씨나 빛의 반사작용 등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로부터 그들은 짧은 순간에 화가가 시각적으로 처음 지각한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라고 믿게 됐다.
상당수의 인상주의자들이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변모해 가는 도시인들의 삶의 풍경을 포착하려 했던 데 비해 피사로는 전원을 무대로 강렬한 보색과 의도적인 방향성을 띤 짧은 붓질,디자인 감각을 결합한 그만의 독특한 인상주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특히 17년에 걸친 퐁투아즈에서의 삶은 그러한 개성적 화풍을 이룩하는 데 있어 중요한 터전이었다. '퐁투아즈 마튀렝의 호밀밭'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화면의 한가운데를 수평으로 나눠 상반부는 하늘,하반부는 수확기 퐁투아즈의 호밀밭을 묘사한 이 작품에는 붉은색과 녹색의 보색 대비,짧은 붓질의 원색 점들의 병렬적 배치를 통해 눈부신 빛의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피사로의 붓의 터치는 모네나 르누아르의 그것보다 훨씬 짧은 데다 감정을 절제하고 있으며 의도적인 구성미 또한 두드러진다.
"사물의 윤곽선을 너무 분명히 그리지 말고 대신 색채의 농담으로 (형태를) 그려 나가라"는 그의 충고는 세잔과 모네를 비롯한 후배 인상주의자들에게 금과옥조가 됐다. 그렇게 해서 호밀밭은 형태가 불분명한 붉은색과 푸른색,노란색 색점들의 집합으로 표현됐지만 오히려 그것이 바람에 끊임없이 허리를 숙이는 호밀의 순간적 인상을 드러내는 데는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호밀밭 너머 저 멀리 보이는 퐁투아즈 시가는 밀밭과 하늘을 잇는 자연과 분리할 수 없는 합일체로 표현됐다. 바로 피사로가 평생 꿈꾸던 경지였다. 퐁투아즈에서 만족할 만한 거처를 찾지 못한 채 돌아온 날 밤 나는 뜻밖의 희소식을 접했다. 귀국을 앞둔 한 한국 유학생이 방을 내놓은 것이었다. 파리 서쪽 센 강변의 쿠르브부아 지역에 있는 현대식 스튜디오였다. 석 달에 걸친 뜨내기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퐁투아즈를 떠돌던 피사로의 영혼이 불쌍한 이방인에게 축복을 내린 것일까.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