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겨울산 겨울나무

산에 오르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지 모른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 오른다는 사람도 있지만,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힘 드는 걸 무릅쓰고 오르도록 만드는 게 무엇 때문일까. 그동안 많은 산에 올랐건만,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는 건 여전하다.

등산 여건으로 보면 우리만큼 복 받은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비록 좁은 국토지만,크고 작은 산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전문 등반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몸에 맞는 산을 골라 오를 수 있다. 알프스나 로키의 산들처럼 멀리서 쳐다보며 즐기는 것이 아니다. 웬만한 봉우리에 올라 멀리 겹겹이 펼쳐진 능선을 보면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오랜 세월의 풍화가 빚어낸 푸근함 때문이리라.등산이 몸에 좋다는 이유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오르막길에서는 가슴 쪽 장기에,내리막길에서는 아랫배 쪽 장기에 저절로 자극이 간다. 온 몸을 골고루 자극해 기운이 활발하게 돌기 시작할 때의 뿌듯함은 세상을 모두 다 가진 것 같다고나 할까. 그 뿌듯함에 맛 들이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산행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한두 번 산에 오르다 보면 마음 수양에도 좋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몸과 함께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막연한 불안감이나 초조함이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나 경험해 봤겠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면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고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마음이 열리게 된다. 가족끼리 산행을 마치고 귀갓길에 말을 걸어보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학교 공부에 찌든 아이들도 서로 먼저 말을 하겠다고 다툴 만큼 말문을 터주는 게 산행 말고 무엇이 있을까.

산에 오를 땐 혼자만의 재미를 찾을 수도 있다. 숲속을 걸으며 나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해보는 것이다. 어느 계절이나 다 좋지만,나무와 가까워지기에는 아무래도 겨울산이 최고다. 사각사각 눈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벌거벗은 나무에 말을 걸어본다. 새소리,바람소리가 배경으로 깔리면 분위기가 더 살아난다. 그 중에는 여름철 치장을 벗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는 나무도 있고 무념무상의 선정(禪定)에 들어간 것 같은 나무도 있다. 나무와 대화를 하고부터는 하찮다고 지나치던 풀 한 포기,나무 한 그루가 하나의 생명으로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자리에 뿌리내리고 온갖 풍상을 이겨내며 수십년,수백년 세월을 버티는 나무들….그들이 이겨내는 인고의 시간들에 뒤늦게나마 눈이 뜨인 것이다. 가지를 하늘로 뻗어 올리고 자리를 잘 잡고 서 있는 나무의 늠름함에 매료된 적도 있지만,바위 틈새에 어렵게 뿌리를 내리고 능선의 세찬 칼바람을 맞고 있는 강인함에 머리가 숙여진 적도 있다.

오늘 새벽에도 집에서 멀지 않은 조그만 산에 올랐다. 산 위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을 보며 가슴 가득 햇살을 받아서 그런지,귀갓길 차 안에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선율이 유난히 가슴 속에 파고든다. 짧은 산행 덕분에 새삼 살아있다는 걸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었다.

문영호 <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yhm@bkl.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