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공부 잘하는 세가지 조건

연말을 정신없이 보내고 오랜만에 가족과 오붓하게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돌이켜 보니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아들녀석과 중학생이 되는 딸애가 요즘 들어 부쩍 더 바빠진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학원을 다니느라 이 녀석들은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곤 한다.

연말모임에서 아이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교육문제가 화제가 됐다. 선배부부들은 "고생문에 들어섰다，이제 시작이다"라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겁을 줬다. 이젠 아이들이 나보다 더 바빠져서 가족여행은커녕 모처럼 내가 일찍 들어가도 얼굴 보기 힘들어졌으니 우리 가족 모두 고생문에 들어서긴 한 모양이다.

저녁식사 후 집사람과 차를 한잔 하며 연말모임에서 나온 우스갯소리로 이야기의 화제가 옮겨갔다.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3가지 조건이 있다는데 그게 우습기도 하지만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뒷맛이 여간 씁쓸하지 않았다.

첫째가 아버지의 무관심이다. 아버지는 시대흐름에 뒤져 옛날 교육방법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 오히려 아버지의 관심은 아이들 학업 성취에 방해가 되므로 차라리 무관심한 게 낫다고 한다. 근래 아버지의 위상이 점차 초라해져가는 현실과 가족 내에서의 역할이 경제적 능력에만 국한되는 세태를 반영하는 얘기라고 생각된다.

둘째는 할아버지의 재력이란다. 난 아버지도 아니고 왜 할아버지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유인 즉슨 아이들 사교육 비용이 아버지들의 벌이로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이 들어가서 재력이 든든한 할아버지가 스폰서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우리나라 출산율은 186개국 중 184위로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 인구 구조의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면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셋째는 엄마의 정보력이다. 사교육 금지 세대였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사교육의 종류는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매우 다양하다. 이처럼 많은 정보 중에 옥석을 가려내는 엄마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학원수업이 끝나는 시간대인 오후 10시는 '신 러시아워'로 불린다. 아이들을 픽업하려는 부모들의 차량이 몰리다 보니 학원 밀집지역에는 교통체증이 출퇴근시간대를 넘어선다고 한다.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회 구성원이 되길 희망하는 것은 부모들의 소박한 바람일 것이고 나 또한 그 중 한사람이다.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소비자들의 기대치가 매우 높아졌고 다양해졌다. 교육도 예외일 수 없다. 공교육의 질을 학부모들이 신뢰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우리의 아이들은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학원가를 배회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학준 서울옥션 대표 junlee@seoulaucti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