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급법 3개월째 공전…하청업체 피해 커져

공정위 개정안 국회서 낮잠…여당도 당론 못 정하고 방치
원자재값-납품가 연동제 등 표의식한 의원입법만 16건
수도권에서 중소 골판지 업체를 운영하는 A사장은 요즘 골치가 아프다. 최근 원자재값이 오르면서 납품가격을 올려야 하지만 원청업체인 대기업은 오히려 납품가격을 깎자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A사장은 "정부가 하청업체 보호를 위해 하도급법을 개정한다더니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정부의 하도급법(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개정 작업이 3개월째 헛돌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작년 10월 중소 하청업체들의 애로를 덜기 위해 하도급법 개정안을 의원 입법 형태로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안의 핵심은 원자재값이 15% 이상 오르거나 제품 가격이 계약 당시보다 3% 이상 오를 경우 중소기업협동조합에 납품단가 조정 신청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조합이 개별 업체를 대신해 납품단가를 협의하도록 신청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원청업체가 하청업체의 기술을 빼내 소송이 붙었을 때 원청업체가 무죄를 입증하도록 했다. 현행법은 하청업체가 원청업체의 책임을 입증해야 해 하청업체의 불만이 많았다. 하도급법 적용범위를 1차 하청업체뿐 아니라 2,3차 하청업체까지 확대하고 6개월 이상 장기어음 결제를 금지한 것도 하도급법 개정안의 특징이다. 문제는 작년 말 정부 · 여당의 '예산 날치기'로 국회가 파행을 겪으면서 개정안이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정부의 '동반성장 붐'을 타고 여야 의원들이 비슷한 개정안을 16개나 쏟아내면서 여당 내에서조차 하도급법을 어떻게 개정해야 할지 당론이 정해지지 않은 것도 문제다.

한나라당 서민정책특별위원회가 제출한 개정안은 대기업의 기술 탈취로 중소기업에 피해가 발생할 때 손해액의 3배를 배상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포함돼 논란을 빚고 있다. 박선숙 민주당 의원이 제출한 개정안은 징벌적 손해배상은 물론 원자재값-납품단가 연동제까지 담고 있다. 조합이 납품단가 조정 협의를 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으며 원자재값 상승분만큼 납품가격이 연동해서 올라야 한다는 내용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원자재값과 납품가격 연동제는 가격 결정에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하게 돼 시장경제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향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한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하도급법 개정안 통과가 더 지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무부처인 공정위도 "조속한 시일 내 처리가 필요하다"는 원론적 입장만 밝힐 뿐 이렇다 할 추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공정위원장과 부위원장이 동시에 교체된 데는 동반성장의 핵심 정책 중 하나인 하도급법 개정이 지지부진한 것도 한몫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법안 처리가 늦어지면서 하도급법 개정만 쳐다보던 하청업체들은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었다. 오진수 한국골판지포장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정부 개정안이라도 빨리 통과됐으면 좋겠다는 게 회원사들의 반응"이라고 말했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