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복지의 허구] 빈곤층 580만 '복지 사각지대' 놔둔채 전국민에 돈 뿌리겠다고?

기초생활수급자만 집중 지원…차상위 계층은 소외되기 일쑤
퀵 서비스·대리운전 기사 등 비정규직은 4대보험도 안돼
무상 패키지 들고 나온 민주당, 재원 마련 방법은 제시못해

정치권이 '복지'논쟁으로 들끓고 있다. 한나라당은 선택적 복지,맞춤형 복지라며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혜택을 받는 '70% 복지론'을 주장한다. 반면 민주당은 전 국민에게 100% 혜택을 주는 '무상복지' 시리즈를 들고 나왔다. 상층부 30%를 포함하느냐 포함하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줘 표밭을 일구려는 계산은 마찬가지다.

복지 전문가들은 우리에게 당장 급한 복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조금씩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서 소외받고 있는 사각지대 저소득층을 세심하게 돌보는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한정된 재원을 골고루 나눠주다 보면 저소득층을 집중 지원해 이들이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재원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빈곤층 대책은 실종

국내 빈곤층 규모는 전체 인구의 하위 20% 안팎인 740만~1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절대빈곤층 13%(시장소득 기준)에 근로빈곤층 5%를 포함해 계산한 수치다.

보건복지부는 기초생활수급자 160만명을 포함한 740만명가량이 '빈곤 정책'의 대상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에 일을 하긴 하는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 푸어' 근로빈곤층도 250만명 규모(한국보건사회연구원)로 추산된다. 일부 겹치는 계층이 있겠지만 넓게 잡으면 1000만명의 빈곤층이 한국에 존재하는 셈이다. 이들에 대한 복지는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 '사각지대 해소'가 복지정책의 최대 이슈가 돼야 하는 이유다.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지만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계층 410만명이 대표적이다. 소득이 거의 없는 독거 노인이 자녀가 어딘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수급자 선정에서 탈락하는 일 등이 비일비재하다.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데도 제도상의 허점으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기초생활수급자보다 조금 더 버는 차상위계층(최저생계비의 100~120% 소득 가구) 170만가구까지 포함하면 580만명이'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차상위계층에 대한 복지 혜택이 기초생활수급자보다 턱없이 적은 탓에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추가 수입이 생기더라도 수급자 지위를 벗어나길 꺼린다.

비정규직이 증가하면서 '보편 복지'의 상징인 4대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퀵서비스 · 대리운전 기사 등 딱히 어느 사업장에 가입되지 않은 경우에는 고용보험과 산재보험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며 "이런 이들에 대한 지원 방법을 고민하는 게 무상복지로 돈 풀자는 것보다 우선"이라고 말했다. ◆"무상복지 할 돈 있으면…"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복지부 공무원들 중에는 무상복지론에 회의적인 이들이 많다. 한정된 재원으로 무상복지를 실시하면 진짜로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빈곤층 복지 재원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 복지부 관계자는 "노인 70%에게 9만~14만원씩 주는 기초노령연금만 해도 받는 사람들이야 쥐꼬리만한 돈이라고 투덜대지만 연간 재정은 3조원 이상 들어간다"며 "무상복지라는 명분으로 전 국민에게 펑펑 돈을 나눠주고 나면 저소득층에게 무슨 돈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무상복지론 때문에 복지부 공무원들도 정책 우선순위에 혼란을 느낀다"며 "그럴 돈이 있으면 지금 당장 저소득층부터 집중 지원해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도 "사회보험이 부실한 한국에서 무상복지는 실정에 맞는 복지정책이 아니다"며 "당장 급한 것부터 해야 하는데 선진국들의 사례를 베껴 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꼴"이라고 비판했다.

정치권이 무상복지론의 근거로 삼는 '복지가 곧 투자'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비판적이다.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도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노대명 보건사회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근로빈곤층의 경우 아무리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절망감을 갖고 있다"며 "이들이 스스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교육과 일자리 알선 등의 투자가 필요한 시기"라고 조언했다. 강신욱 보사연 연구위원은 "무상급식이나 대학 등록금보다 중등교육을 의무교육으로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재원 마련 방법도 제시 못해

무상복지에 드는 재원도 논란거리다. 민주당은 연간 16조~22조원이면 무상의료 · 무상보육 · 무상급식 등 '무상 패키지'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원 마련 방법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채 의견이 분분하다.

무상의료만 따져도 민주당은 연간 8조1000억원이면 된다고 밝혔지만 복지부의 계산에 따르면 30조원이 필요하다.

한나라당은 이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무상복지 재원이 연간 16조~22조원이 아니라 43조원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에 따라 당내에 '지속가능한 복지 태스크포스(TF)'를 만들겠다고 18일 발표했다. 민주당도 내부적으로는 '증세 없이 복지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데 공감대를 갖고 특별기획단을 만들어 조만간 부유세 신설 등 재원 조달 논의에 착수키로 했다. 그러나 무상복지론으로 촉발된 '폭넓은 복지 혜택'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다.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