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부자는 지금] 유언신탁 인기비결…며느리 아닌 손자에 상속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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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지정한 사람에게 유언장 없이도 상속 가능서울 강남에 사는 김모씨(71)는 최근 한 시중은행의 유언신탁 상품에 가입했다. 유언신탁이란 유언장 없이도 신탁(trust) 계약을 통해 상속해 줄 수 있는 금융 상품이다. 총 재산이 100억원대 부자인 그는 보유 중인 강남 빌딩 2채를 각각 큰 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유언장을 쓸 수도 있지만 공증을 받아야 하는데다 유언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인의 자녀들이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사례를 주변에서 적잖게 봐왔다.
그래서 그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은행을 이용하기로 했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두 아들이 건물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던 김씨는 은행에서 종합적인 관리 서비스까지 대행해 준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김씨는 "혹시 나중에 아들한테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며느리가 아닌 손자에게 상속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안심이 된다"며 "미리 상속에 대한 준비를 다 해놓으니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최근 강남 부자들 사이에서 은행 유언신탁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김영훈 하나은행 압구정 골드클럽 PB팀장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이 유산을 놓고 원수처럼 싸우다 멀어지는 사례들을 숱하게 목격한 부자들 사이에서 미리부터 상속을 준비해야겠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은행이 판매하는 유언신탁 상품에 가입할 경우 골치아픈 상속 문제에서 해방되는 데다 전문가로부터 종합적인 자산관리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어 유리하다"고 말했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4월 '하나 리빙 트러스트(Living Trust)'란 상품을 출시했다. 고객이 생전 및 사후에 신탁재산의 수익권을 취득할 수 있는 수익자를 지정함으로써 유언장이 없더라도 금전,증권,부동산 등 고객자산을 종합 관리할 수 있다. 이 상품을 총괄하고 있는 배정식 하나은행 신탁부 차장은 "자수성가한 부자들일수록 자신이 평생 힘들여 모은 재산이 엉뚱한 사람에게 홀랑 넘어가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한다"며 "유언장은 수시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유산 분쟁의 가능성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은행이 재산을 맡아 관리하고 있다가 계약에 따라 고객이 지정한 사람에게 넘겨주기 때문에 보다 공정한 처리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 상품은 기본적으로 다른 신탁 상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저 가입금액은 현금 5억원,부동산 10억원이다. 생전에는 고객 의사에 따라 재산을 운용하고 사후에는 계약 내용에 따라 상속이 집행된다. 상속인이 미성년자일 경우 재산관리 능력이 없다고 판단,일정 나이에 이를 때까지 은행이 대신 관리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수수료는 기본 수수료와 운용 수수료로 나뉜다. 기본 수수료는 신탁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금 조로 낸다. 재산가액의 0.2~0.3% 수준이다. 운용 수수료는 재산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일정부분을 떼는 방식이다. 수익의 4~7% 정도다. 외환은행도 지난해 초부터 VIP 고객을 위해 유언서 작성 지원 · 보관,상속 재산의 집행 및 유훈 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언신탁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유언 관련 상담을 원하는 고객에게는 전문 변호사 및 세무사 상담을 통해 상속 재산을 둘러싼 남은 가족의 혼란과 분쟁을 방지하고 원만하게 재산을 이전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유훈 통지 서비스'는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 유언서의 법적 구비 요건을 따지지 않고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유훈' 또는 '재산목록 등 중요한 것'을 기재한 문서를 안전한 은행 금고에 보관했다가 미리 정한 수령인에게 사후 발송해 준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