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통일의 키워드는 국력

獨 경제·군사력으로 분단 극복
고도성장 이루고 국방 증강할때
2011년은 독일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세기부터 분단과 통일을 거듭한 독일.지난해가 독일 2차 통일 20주년을 맞은 해였다면 올해는 독일이 처음으로 통일 국가가 된 지 140주년이 되는 해다. 두 번에 걸친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통일의 키워드는 국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1차 통일 과정에서 군사력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독일 북부의 소국 프러시아가 통일을 이룬 데는 국방력 강화 정책이 큰 힘이 됐다. 빌헬름 1세는 알베르트 폰 룬과 헬무트 폰 몰트케를 앞세워 프러시아군을 최정예로 만들었다. 철도를 이용한 병력 이동 전술을 개발하고,대(大)부대 운용 방침을 수립했다. 최신예 전투 및 통신 장비를 확충하는 한편 간부 교육 및 지휘부 조직 혁신을 단행했다. 이런 노력은 눈부신 결실을 맺었다. 1864년 프러시아군은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뒀다. 홀스타인과 슐레스비그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2년 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도 쾌승을 거두었다. 프라하 조약을 통해 통일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1871년에는 통일을 방해하던 군사 대국 프랑스도 무릎 꿇게 했다. 1871년 1월 세당에서 대승을 거둔 빌헬름 1세는 통일 독일의 황제로 즉위했다.

2차 통일에선 경제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은 놀라운 경제 성장을 거듭했다. 1973년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 되고 3년 뒤에는 주요 6개국(G6)의 창립 멤버가 됐다. 인플레이션은 1988년 기준 1.2%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통일을 반대했던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염원이었던 유럽경제공동체 건설에 독일의 참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독의 경제력은 구 소련의 반발을 잠재우기도 했다. 1990년 서독은 소련에 1억마르크 상당의 식량을 원조했다. 동독이 붕괴한 뒤 본국으로 철수하지 못한 동독 주둔 소련군을 위해 무상으로 거주지를 마련해 줬다. 그뿐이 아니었다. 경제난 완화의 명목으로 50억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통일 묵인의 대가로 거액을 약속했다. 덕분에 구 소련 지도부는 통일 지지자가 됐다. 우리는 어떤가? 경제력은 주변국들에 비해 왜소하기만 하다. 일본과 중국이 2010년 상반기 현재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각각 세계 2위와 3위 규모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13위에 머물고 있다. 주변국,특히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도 문제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금융위기 이후 절반 이상의 수출품이 중국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경우 통일 과정에서 우리의 발언권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군사력은 동북아 최약체 중 하나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김영삼 정부 이후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계속 하락해 왔기 때문이다. 정신 전력 강화는 물론이고 전력 투자도 소홀히 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국방력 증강을 도외시한 사이 북한은 핵무기를 포함한 비대칭 전력 건설에 매진해왔다. 매년 국방비를 두 자릿수 이상 증액해 온 중국은 조만간 한반도 비상 사태 발생 시 항모 전단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 증원군을 위협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통일 논의는 국력 신장과 통일의 연관 관계에 대한 심고원려 없이 진행되고 있다. 김정일 정권이 자체 붕괴할 것이라는 전망 또는 희망에 의존해 있거나 검토 중인 정책 중 일부는 국방력 강화와 고도 경제 성장을 저해할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차기 대권 주자들의 비전은 달라지기를 기대해 본다. 차기 대선 공약은 국력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청사진을,주변국이 아닌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통일을 위한 방안을 담고 있기를 기대해 본다.

윤계섭 < 서울대 명예교수·경영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