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부의금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사회장을 치를 때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김종필 당시 민자당 대표가 부의금 때문에 구설수에 휘말렸다. 모자라는 장례비를 충당하려고 기업들로부터 1억원을 거둬들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탓이다. 고인의 경력에 맞춰 거창하게 치르려다 보니 정부 보조금으론 턱없이 부족해 무리를 한 것이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기업으로부터 돈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한 터여서 파문이 더 컸다.

부의금은 불행을 당한 이웃을 위로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담겼다는 점에선 나쁠 게 없다. 오랜 미풍양속인 상부상조의 전통이 '봉투'전달로 바뀌었다고 할까. 다만 너무 계산적이고 형식화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많든 적든 한 번 받으면 일종의 빚이 돼 언젠가는 되갚아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체면치레를 앞세우다 보면 부부 사이에 말다툼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경조사비와 관련된 '장부'를 만든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조사비는 가끔 로비 수단으로도 쓰인다. 업무 거래선이나 인허가 부서에 정도 이상의 액수를 보내는 경우다. 그래서 국민권익위는 공직자 경조금 상한을 고위직 10만원,하위직 5만원으로 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도입된 리베이트 쌍벌제에선 의 · 약사들이 원칙적으로 경조사비를 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우리나라 가구당 경조사비 지출은 46만7000원,전체로는 7조6000억원(2007년 · 통계청)이나 된다. 이쯤 되면 준(準)세금에 가깝다. 서로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처럼 부의금을 통째로 기부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만하다. 장례식장 밖에 모금함을 놓고 모인 부의금을 고인의 이름으로 불우이웃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체면 따질 일도,누가 얼마 냈는지 알 일도 없을 게 아닌가.

22일 타계한 박완서 선생이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삼성서울병원 빈소에도 고인의 뜻에 따라 '부의금을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네티즌들은 '생전에서도 잔잔한 감동을 주셨는데 가시는 길에도 맘을 헤아려 주시네요''하나하나의 생각이 정말 깊으신 것 같아요' 등 애도의 글을 올리고 있다. 문단의 큰별이었으면서도 소탈함과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고인의 마음이 생생하게 읽힌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