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보통 남자로 변신한 오이디푸스…잘 익은 비극 연기에 전율

연극 '오이디푸스왕'
"아침에는 아비를 먹고,한낮에는 어미를 먹고,저녁에는 제 두 눈을 파먹고 헤매는 짐승,바로 나,오이디푸스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 손,진실이라곤 그 무엇 하나 볼 수 없던 이 두 눈을 찌른 손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의 손이다. "

무대에는 9m 이상의 절벽이 수직으로 서 있다. 위에는 가시 같은 70개의 봉이 불규칙적으로 꽂혀있다. 그 사이를 오가며 흰 분필로 그려낸 민중의 얼굴이 관객을 슬프게 바라본다. 극이 진행되면 그 눈에서 흰 눈물이 흘러내린다. 무대는 뒤쪽이 솟아 있다. 가파른 수직무대에 위태롭게 매달린 시민 5명은 봉 사이를 오가며 울부짖는다. "배고프다,살고프다…." 저주받은 도시,테베의 모습이다.

한태숙 연출가는 기원전 5세기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왕(사진)'을 2011년 1월 명동예술극장에서 부활시켰다. 원작과 다른 점은 왕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 오이디푸스를 보여주려 한 것.

테베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는 오이디푸스왕에게 크레온은 태양신의 신탁을 전한다. '전왕 라이오스를 죽인 살인자를 찾아 처형하라.'오이디푸스는 전왕의 살인자를 찾기 위해 예언자 테레시아스를 찾는다. 오이디푸스의 기대와는 달리 예언자는 '당신의 적은 바로 당신'이라는 말만 남긴다. 예언자의 불길한 저주를 듣고 격노한 왕은 '나는 누구인가'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때 등장한 왕비 요카스타(서이숙 분)는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전왕의 죽음에 대해 설명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오이디푸스는 점점 더 깊은 공포와 혼란에 사로잡힌다. 왕비와 늙은 양치기로부터 들은 그의 출생에 얽힌 비밀,예언자의 불길한 이야기가 하나로 꿰어지며 비로소 저주받은 삶의 의문이 풀린다.

괴로워하는 오이디푸스의 다리 사이로 무대 바닥에 세 갈래 길이 그려진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왕을 죽인 곳이자 운명을 피해 도망치던 그 길 위에 서서 오이디푸스는 절규한다. 비극의 정점이다.

"아,잔혹하다,신이여.남편에게 남편을 자식에게 자식을 낳아주게 하다니…." 10여년 전 '네 뱃속의 아기가 태어나면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잠자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갓낳은 아들의 두 발목을 묶어 절벽으로 던져버렸던 왕비 요카스타는 오이디푸스의 발목을 붙잡고 울부짖는다. 원전의 오이디푸스가 저주받은 삶을 초인적 의지로 헤쳐간다면 이 작품의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보지 못했던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영웅이 아닌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예언자 티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얘기하듯 '두 눈을 뜨고 있으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알고 있는 것이 아무 힘도 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닮았다.

'오이디푸스'는 재단법인 국립극단(예술감독 손진책)의 창단작품이다. 또렷한 발성과 울림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연극계의 대모 박정자씨와 오이디푸스역의 이상직씨,크레온 역의 정동환씨와 요카스타역의 서이숙씨 등의 잘 익은 연기는 맨 뒷좌석 관객까지 빨아들인다.

오브제 연출가 이영란씨가 수직의 판 위에 67개의 인물을 백묵으로 그려내고,현대무용 안무가 이경은씨는 몸의 비명을 춤으로 표현한다. 작곡가 원일씨는 북과 거문고 아쟁 등 전통 악기만으로 비탄의 음악을 웅장하게 그려낸다. 생략과 압축의 묘미에 원숙미까지 겸비한 작품이다. 내달 13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