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페' 낀 시계 장인이 1㎜ 굵기 핀ㆍ나사 조립
입력
수정
스위스 명품시계 '예거르쿨트르' 공장 가보니'눈 덮인 산과 넓은 호수,그리고 아담한 시골 집들이 어우러진 발레드주.'
부품 A부터 Z까지 자체 생산
조립에만 한달 넘게 걸리기도
각종 문양도 장인이 직접 새겨
1000시간 테스트 통과해야 출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랑스 접경지대에 있는 쥐라산맥을 향해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달리자 '그림 엽서'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해발 1000m 산악지대에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이 예거르쿨트르,브레게,파텍필립,바쉐론콘스탄틴,오데마피게 등 스위스 시계 명가들의 '고향'이 된 건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 눈이 내리면 마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던 농부들이 18세기부터 겨울철 소일거리로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 게 오늘날 '세계 최고의 시계마을'이란 타이틀을 안겨준 것이다. 발레드주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시계 공장은 작은 호수마을인 르상티에에 있는 예거 공장.1833년 문을 연 이곳은 작은 나사부터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투르비옹'(중력으로 인한 초 단위 오차를 줄여주는 장치)까지 시계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을 100% 자체 생산하는 몇 안 되는 공장이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에 해당하는 무브먼트(동력 장치)를 1260개나 개발한 장소이기도 하다. 250명 안팎의 시계 장인을 비롯한 1100여명의 근로자가 만들어내는 시계 생산량은 연간 4만5000~5만개에 달한다. 2만5000㎡ 규모의 이 공장에 '그랑 메종'(큰 집)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다.
에스텔 네그렐로 공장 홍보담당 매니저는 "예거의 무브먼트는 35개 톱 브랜드들이 구입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계 제작의 출발점은 공장 한쪽에 마련된 디자인실이다. 130여명의 시계 공학자와 기술자들이 모여 무브먼트와 디자인 등을 결정한 뒤 실제 개발할 수 있는지를 점검한다. 신모델을 기획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만 2년가량 걸린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본격적인 제작은 공장 1층에서 시작된다. 얇은 철판이 다양한 형태의 거푸집과 커팅머신에 들어가자 이내 톱니바퀴,나사,핀 등 각종 부품으로 바뀌어 나왔다. 예거가 보유한 거푸집 모형은 1만개에 이른다. 모델에 따라 들어가는 부품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기계'로 생산된 부품들은 담금질 과정을 거쳐 숙련공의 '손'에 건네진다. 수천개의 부품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돌아가는 기계식 시계의 특성상 1㎜만 어긋나도 오차가 생기기 때문에 숙련공들이 하나하나 다듬는다. 네그렐로 매니저는 "작은 회전추 하나도 46가지 공정을 거쳐 완성한다"며 "시계에 새긴 각종 문양도 장인들의 손끝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장인들은 이렇게 제작된 부품들을 핀셋을 비롯한 각종 도구를 이용해 조립한다. 1㎜에 불과한 나사와 머리카락 굵기의 핀을 조립하기 위해선 현미경과 루페(loupe · 눈에 끼우는 확대경)는 필수다. 간단한 모델은 2시간이면 조립할 수 있지만,'3차원 투르비옹'(평면 회전이 아닌 전후 · 좌우로 도는 투르비옹) 등 복잡한 장치가 달린 시계는 조립하는 데만 한 달 반 정도 걸린다. 시계의 '속살' 조립이 완료되면 별도 제작실에서 만든 시계 케이스에 끼워 맞추는 것으로 제조 공정은 일단락된다. 다음 코스는 테스트룸.예거는 제작한 모든 시계를 대상으로 1000시간 동안 충격,방수,온도 변화 등에 잘 견디는지 점검한 뒤 판매한다.
'몸값' 높은 스위스 장인이 수작업으로 만드는 만큼 가격은 '상상 이상'이다. 가장 싼 모델도 700만원이 넘는다. 투르비옹,미닛 리피터(시 · 분을 소리로 알려주는 장치),퍼페추얼 캘린더(한 달이 28,30,31일인 경우와 윤년까지 인식해 날짜를 표시하는 기능)가 장착된 '마스터 그랑 트래디션 컴플리케이션'(사진)은 5억원을 호가한다.
이일환 예거르쿨트르코리아 브랜드매니저는 "국내에 명품시계 붐이 일면서 지난해 매출이 2009년보다 76%나 늘었다"며 "한국의 명품시계 시장은 초기 단계인 만큼 앞으로 상당기간 큰 폭의 성장을 거듭할 것"이라고 말했다.발레드주(스위스)=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