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인요한 소장 "다문화 포용은 통일 위한 연습…우리가 먼저 변해야죠~잉"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난 순천서 자란 촌놈"
한 달에 두 번 방문…어른들 더 반겨 노인지혜 듣는 아랫목 교육이 좋았제

"경제 어렵다"는 말은 4대 거짓말?
재벌같이 사는데 행복한지 몰라…'한강의 기적' 나눠줄 여유 가졌으면

한국사회 갈등 치유하려면
논란 감추려 말고 자주 공론화…비판은 세련되고 유머러스해야
"한국사람들은 세 시간만 같은 방에 있으면 금세 주류와 비주류로 갈려요. 전라도 사람들이 '우린 그렇게 안 살아'라고 자주 말하는데,그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아집이라고 볼 수 있어요. 보수와 진보가,남과 북이,한국인과 다문화가정이 어울려 살려면 이런 의식을 버려야 해요. 남보다 우리가 먼저 변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51)은 지난 2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보이고 있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이 늘고 있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니겠느냐"며 "통일을 위한 연습이라 생각하고 우리 사회가 다문화가정을 포용할 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부터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새 국적법이 발효되면서 100만명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와 그 자녀들이 보다 쉽게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될 전망이다. 미국 시민권자인 인 소장도 금명간 한국 국적을 신청할 계획이다. 그도 버젓한 한국 주민등록증을 갖게 된다는 얘기다. 그의 미국명은 존 린튼.린튼 가문의 대를 잇는 한국사랑 이야기를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들어봤다.

▼최근 건국 이후 10만번째 귀화자가 나왔죠.

"그동안 한국 · 한국인 · 한국음식이 좋아서,사업 때문에 귀화하고 싶은 외국인이 엄청 많았는데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올해부터 국적법이 완화돼 이중국적 취득이 허용된다니까 100만명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와 그 자녀들이 쉽게 한국 국적을 쉽게 취득할 것 같아요. "▼귀화인에 대해 어떻게 배려해야 합니까.

"우리 린튼 가문이 한국에 살면서 이나마 이해하는 데 4대나 걸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참 형님(한국관광공사 사장)은 참 존경스러워요. 당대에 홀로 정착해 나보다 한국을 깊이 있게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편이 어려운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한국에 적응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한국인들이 여유를 갖고 귀화인에게 언어 소통,2세 교육,기본적인 복지 등에서 많이 베풀어줘야죠."

▼선조들이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지요. "조상들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인근의 이스트린튼과 웨스트린튼에 살던 켈트족이었습니다. 하도 무식하고 거칠어서 만리장성 같은 담을 쌓아놓고 버티니까 로마도 힘을 못썼죠.영국 성공회가 장로교파인 린튼 일족이 미워서 가톨릭교도가 점령한 아일랜드로 강제로 이주시켜 버렸어요. 서로 박치기하게.그럭저럭 잘 버텼는데 감자에 바이러스가 번지는 기근이 들자 어쩔 수 없이 1년간 번 돈을 털어 신대륙으로 가는 배를 탔죠.미국 해안가에 내리기 직전 해적한테 털려 겨우 목숨만 건졌대요. 하지만 워낙 부지런하니까 조지아주에 아주 넓은 경작지를 일궜는데,할아버지(윌리엄 린튼)가 미국 남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

▼전라도가 고향이 된 계기는 뭡니까.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을 세운 언더우드와 알렌 등 북장로교는 서울을 무대로 활동했는데,너희들(남장로교)은 동학혁명이 끝난 뒤 골치 아픈 남쪽(충남 호남)으로 내려가서 포교하라고 했대요. 외증조부(유진 벨),할머니(샬롯 벨),할아버지가 목포 광주 전주 대전 등지에 여러 학교와 병원을 지었죠.할아버지가 전주에서 선교하니까 아버지는 같은 구역에 있으면 안된다고 해서 순천으로 옮겼고,그 때문에 내 고향이 순천이 돼부렀어요. "▼곧 설인데 고향은 자주 가시나요.

"한 달에 두 번은 가요. 지리산도 가야 되고 순천 안 가면 못살어.친구랑 어른들 한바퀴 돌아보는데 안 오면 무지무지허게 섭섭히 생각허지.어른들은 지금도 '짠'(존)이 왔냐고 반가워들 허셔."

▼설이면 어떤 추억이 떠오릅니까.

"설은 내가 매곡동,금곡동,박남봉에 등장하는 날이여.파란 눈의 서양애기가 세배와서 넙죽 절하니까 어른들이 얼마나 귀여워했겄어.돈 많이 벌어 친구들과 맛난 것 사먹고 폭음탄(폭죽) 사서 놀았제.고구마를 씻어서 보관하면 썩어부러.겨울이면 시골에서 윗목에 고구마를 쟁여놓고 먹어내려가는디 낮에는 고구마와 김치로 버티고,밤에만 밥을 먹었어요. 그게 보릿고개여.설 전후로는 고기와 떡국을 일단 잘 먹을 수 있어 좋았어요. "

▼어릴 적 시골의 '아랫목 교육'을 되살려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시던데.

"옛날엔 땔감이 모자라 가래나무나 낙엽 같은 걸 긁어다 군불을 땠죠.이 빠진 할머니가 10원에 10개 하는 눈깔사탕을 애들과 함께 빨면서 소싯적 얘기,여순사건,6 · 25전쟁 얘기를 하면서 삶의 지혜를 전수해 주셨죠.그런데 지금은 노인을 흉측하게 여겨요. 애들이 '방콕(자기 방에서 주로 지냄)'하고 TV나 인터넷만 해요. 나도 나이를 먹으니 노인의 가르침이 소중하다고 느껴지네요. "

▼자녀들은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해라 말한 적이 없어요. 스스로 찾아가게 해야지요. 하버드대에 한국계가 가장 많이 입학하지만,6개월 이상 못 버티는 학생도 가장 많아요. 왜냐면 대학 수업엔 엄마가 안 따라가니까. 그에 비하면 우리 큰딸은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어요. 시카고예술대에 들어가야 하는데 SAT 점수가 20점 모자랐어요. 난 아무 생각도 못했는데 글쎄 딸이 '영어는 충분히 잘하고 다문화권에서 이 정도 점수면 감수하고 뽑아줘야 하지 않느냐'고 입학처에 전화했대요. 며칠 후 합격 통보가 왔어요. 참 당돌허죠잉."

▼북한에 여러 번 갔는데요.

"그 사람들은 남한 사람이 돈 많고 힘 세고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요. 과거 우리가 반공교육을 받을 때 북한 사람을 뿔 달린 사람처럼 여긴 것마냥.북한에는 언론이 없어서 조선족한테 남한 소식을 전해듣는데,남한 사람들이 조선족을 무시하고 학대한 게 죄다 북한 사람들 귀에 들어가버려요. 우리가 조선족한테 잘 해야 돼요. 아이고,그리고 조선족이 다 뭐여.재미교포 재일교포하듯이 중국교포라고 불러야제.통일을 이룰라면 중국 동포에게 노동비자 잘 주고 의료보험 혜택 줘야 돼요. 북한더러 변하라고 하기 전에 우리 먼저 변해야죠."

▼한국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양의 유대인이지.똑똑하고 부지런하고 본성이 선량해요. 그런데 자기들끼리 잘 싸워요. 반대로 밖(외국)에만 나가면 붙임성 있게 잘 적응하고 열심히 살아서 1~2년이면 집을 사죠.미국애들은 10년이 넘어도 못해요. 또 달구지 타고 다닌 게 엊그제인데 50년 만에 비행기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아주 재벌같이 사는데 지들이 그걸 몰라요. 내가 한국서 50년 살았지만 여태까지 경제가 좋아졌다는 말 들어본 적이 없어요. 처녀가 시집 안간다,노인이 그만 살아야겠다,장사꾼이 밑지고 장사한다와 함께 한국인이 경제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4대 거짓말이야.우리가 행복한지를 알고 '한강의 기적'을 못사는 나라에 가르쳐줄 여유와 자긍심을 가져야 해요. "

▼왜 인 소장의 한국 이야기를 다들 재미있게 듣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새로운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고 잊고 있던 한국인의 정과 미덕을 새삼 깨닫게 해주니까 다들 무릎을 쳐요. 나는 좌도 우도 아니고 중도입니다. 자기네들 아픈 이야기를 꼬집으면 거북스럽게 여기고 화를 내는데,내가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덕여요. 너무 세게 비판하면 아파하니까 솜방망이로 약하게 때려요. 한국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려면 논란을 감추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자주 공론화하고 유머러스하게 비판해야 돼요. "

▼곧 한국 국적을 취득할 텐데 감회가 어떻습니까.

"난 한국에서 가장 행복한 한국인이에요. 우리 조상들은 한국에서 병원 짓고,학교 열고,바닷가 간척해 없는 사람한테 나눠주고,준 게 많을지 몰라도 나는 준 것 없이 받은 게 훨씬 더 많아요. 이 부족한 사람이 정원외로 연세대 의대에 입학해 의사가 됐고,최연소로 병원 내 부서장이 됐는데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민이 깊습니다. 앞으로도 소외계층을 돕고 대북 지원에도 열심히 나서야죠."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

인요한 소장은…4대째 한국사랑 '碧眼 의사' 전라도 사투리로 대중에 어필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이 한국에 뿌리를 내린 이래 그의 자녀까지 4대째 한국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벽안의 의사다. 제왕절개로 전주예수병원에서 태어나 초 · 중 · 고 시절을 전남 순천에서 보냈다. 그 시절 매곡동에 살면서 독싸움(投石戰),감서리,앵두서리,잉어서리,자치기,땅따먹기,구슬치기하던 추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해 순천을 '우주의 중심'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연세대 의대를 거쳐 고려대에서 석 · 박사 학위를 받았고,미국 뉴욕주의 플러싱병원(소아과)과 코넬대 산하 브루클린퀸스가톨릭병원(가정의학과)에서 수련하면서 미국 의사면허도 취득했다. 1991년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겸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부임,20년째 주한 외국인을 진료하고 있다.

인 소장은 1997년 이후 22차례나 북한을 드나들며 무료 진료,앰뷸런스 · 의약품 · 의료기자재 기증 등 대북 의료지원 활동을 펼쳐왔으며,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스타 강사로도 유명하다. 그는 일제수탈기와 6 · 25전쟁을 겪었던 그의 선조와 한국인들이 시련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따뜻한 정'과 '늘 웃던 낙천성'을 되찾자고 주장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통역을 맡았다가 신군부로부터 '권고추방' 명령을 받았으나,연세대 치의예과에 다니던 이지나씨와 급히 결혼해 추방을 면했다. 부인과 1남2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