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 기행] 點들이 펼친 色의 마술…파리지앵의 시간을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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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센강은 파리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역(逆)U자형의 곡선을 그리다가 블로뉴숲 부근에서 황급히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물머리를 돌린다. 잠시 후 장어같이 가늘고 긴 두 개의 섬이 나타나는데 아래가 퓌토 섬이고 위가 그랑드자트 섬이다.
당대 과학 성과 토대…혁신적 점묘법 도입
보다 빛나는 色 얻으려 팔레트에서의 혼합 거부
드로잉·습작만 60점…2년 넘게 공들여 완성
그랑드자트 섬은 지금까지도 주말이면 파리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유원지다. 섬의 좌측은 쿠르브부아,우측은 뇌이 쉬르 센인데 이 중 쿠르브부아는 파리의 위성도시인 라데팡스에 속해 있는 지역이고 뇌이 쉬르 센은 파리와 일 드 프랑스(파리 외곽의 수도권) 지역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곳으로 유명하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샹송가수 파트리샤 카스 등이 뇌이 쉬르 센 주민이다. 나는 유학시절 쿠르브부아에서 3년간 살았기 때문에 주말이면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그랑드자트 섬으로 자주 산책을 나서곤 했다.
그랑드자트 섬이 유명해진 것은 인상주의 화가인 조르주 쇠라가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발표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만 이곳은 그 전부터 모네,반 고흐 등 인상주의자들이 즐겨 찾은 곳이기도 했다.
마지막 인상주의 그룹전에 출품된 이 작품은 점묘법이란 혁신적인 기법으로 인해 비난의 표적이 됐지만 한편으론 피사로,마티스 등의 열렬한 추종을 받게 되고 인기 잡지 '보그'의 호평에 약관의 쇠라는 단숨에 유명세를 타게 된다. 쇠라는 1859년 파리에서 법원 집행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독을 즐기는 '따로 국밥'형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 별난 유전자는 그의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부모 몰래 누드모델과 살림을 차렸는데 그 사실을 죽기 이틀 전에야 부모에게 알렸다고 한다)
쇠라는 1877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해 본격적인 화업에 정진한다. 1880년 그는 점묘법으로 그린 '아니에르의 멱감는 사람들'이라는 대작을 살롱에 처음 출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그가 사용한 점묘법은 혼합되지 않은 순색의 작은 점들을 찍어가며 형태를 완성하는 방법으로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지 않고 이것을 사람들의 시각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혼합시켜 훨씬 더 밝게 빛나는 색감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살롱 낙선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쇠라는 1884년 자신의 화법에 공감한 폴 시냑,막시밀리앙 뤼스 등과 함께 독립예술가협회를 조직해 인디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는다. 그의 독창적인 기법은 당대 과학의 발전 성과를 탐구함으로써 터득한 것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화학자 슈브뢸의 색채 이론이었다. 슈브뢸은 서로 다른 두 색채를 병치하거나 살짝 겹쳐 놓고 이것을 좀 떨어져서 보면 제3의 색채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빛의 효과를 탐구했지만 좀 더 견고한 화면을 구축하려던 점묘파 화가들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색채심리학자 오그덴 루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데 그는 물감은 삼원색이 섞이면 검정색이 되는 데 비해 빛은 흰색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이는 쇠라에게 보다 빛나는 색채를 얻기 위해서는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새로운 기법이 집약된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그는 이 그림을 2년에 걸쳐 완성했다. 아침이면 그랑드자트 섬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아틀리에로 돌아와 마무리 작업을 했다. 그가 이 작품에 들인 공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남아 있는 드로잉과 색채 습작이 60점을 넘는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차분한 정적이 감도는 화면은 크게 빛과 그늘의 영역으로 나눠진다. 전면의 그늘의 영역을 보면 오른쪽에 직립한 중산층 부부가 센강을 바라보고 있고 왼쪽에는 사공인 듯한 사내가 수평에 가까운 자세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어 기하학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뒤쪽의 빛의 영역에도 휴식을 취하고 레저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한가롭다. 3m가 넘는 커다란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점묘법 이론에 따른 무수한 순색의 색점들이 병치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순색의 색점들은 우리 눈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혼합돼 부드러운 중간색 톤으로 지각된다. 그것은 '과학자로서의 화가'라는 새로운 개념에 입각해 자신의 회화세계를 추구해나간 한 우직한 화가의 치열한 도전의 결과다.
그렇다면 과학에 기댄 쇠라의 그림에서 낭만은 영영 사라진 것일까. 과학은 낭만의 집요한 '스토커'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비의 영역은 축소일로를 걷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쇠라의 그림은 뜻밖에도 기묘한 역설을 불러일으킨다. 과학성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신비감은 오히려 강화된 것이다.
비밀은 뭘까. 그것은 쇠라의 그림이 과학에 의존하긴 했지만 구체성보다는 전형성에 기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만 따뜻한 숨결이 느껴지는 이웃과는 거리가 멀다. 이유는 또 있다. 다이내믹한 운동감보다는 평온한 릴렉스의 순간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시간이 멈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과학의 발전이 낭만의 성역을 해체하리라는 노파심은 아마도 나같은 소심증 환자의 기우일지도 모른다. 쇠라의 그림은 과학을 매개로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던 낭만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점묘화는 과학이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많은 낭만적 도피처를 우리에게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일깨운다. 과학을 통해 신비의 영역을 제거하려했던 오만한 과학은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것일까. 낭만주의자들이여,과학의 스토킹을 허(許)하라!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