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물가압박에…中企 "납품가 말도 못 꺼내"

급등한 원자재값 반영 못해…생활용품·주물업계 속앓이
골판지업계 '납품 갈등' 재연…中企 "가격인하 부담 짊어져"

고추장 등 장류를 생산하는 A사는 최근 2년 만에 자사 브랜드 제품의 가격을 10%가량 인상했다. 콩,밀가루,고춧가루 등 재료 가격이 급등하다 보니 기존 판매가로는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어서다.

하지만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대기업에 납품하는 제품의 가격은 올리지 못했다. 대형 식품업체들로부터 "지금은 인상할 분위기가 아니니 기다려 달라"는 말만 듣고 있다. A사 관계자는 "일부 업체와는 납품가격 조정에 들어갔지만 분위기가 녹록지 않다"고 전했다. 이 회사의 OEM 비중은 70% 수준이다.

정부의 전방위 물가 인하 드라이브가 대기업 납품 중소기업으로 불똥이 튀고 있다. 대기업에 OEM으로 완제품을 납품하거나 중간재료를 공급하는 회사들은 최근 각종 원자재 가격 폭등에도 불구하고 이를 납품가격에 반영하지 못해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정부의 관심이 가장 많이 쏠려 있는 식료품,생활용품 분야가 대표적이다.

B사의 경우 물엿 가격이 1년 전에 비해 15%,밀가루 가격은 10% 올랐지만 납품가격에 반영하지 못하면서 수익성이 나빠졌다. 햄버거용 빵을 만들어 대기업과 국방부 등에 납품하는 C사도 원재료 가격 인상분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C사 관계자는 "정부의 가격 억제에 따른 부담을 우리가 대부분 짊어지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샴푸,세제 등에 들어가는 계면활성제를 만들어 관련 대기업에 납품하는 D사도 최근 상승하는 재료 가격 때문에 고민이 쌓여가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엔드유저(대기업)들이 최근 분위기 탓에 가격을 올리지 못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상생을 얘기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대기업들이 납품 중소기업들에 원자재값 인상 부담을 공동으로 지자고 요청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대 · 중소기업 간 납품가격 인하 갈등도 재연되는 모양새다. 식료품 업체나 할인마트 등에 제품용 상자를 납품하는 골판지업계가 대표적이다. 이달 초 대형 식품업체 E사는 골판지 업체들에 새로운 공급견적서를 요청했다. 납품단가를 내려 달라는 주문이다. 한 업체 관계자는 "10여년간 공들여 겨우 납품을 시작했는데 다시 가격을 적어내라니 난감하다"며 "골판지 원료인 폐지 가격이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어 출혈 경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골판지 업체 대표는 "지난해 말 또다른 대형 식품업체가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했다가 대 · 중소기업 상생 분위기 때문에 흐지부지됐는데 몇 달 만에 다시 단가 인하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며 "폐지 수입 확대 등 근본적 처방 없이 정부가 유통업체를 억누르다 보니 관련 납품업체들에 불똥이 튀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주물업체들도 불만이 커지고 있다. 화학원료인 프란수지 가격이 지난해 말 이후 40%나 폭등했지만 대기업 1차 협력업체들과 가격 조정을 못하는 상황이다.

고경봉/남윤선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