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영혼의 복수…가족으로 포장된 위선 벗겨냈죠"

연극 '유리알 눈' 연출 카티 라팽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거나 죄의식조차 못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냉정하게 담아내고 싶었어요. "

프랑스 출신의 연극 연출가 카티 라팽(사진).해외 연출가가 특정 작품을 위해 한국에 잠시 머무르는 일은 많지만 국내에 거주하면서 배우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외국인 연출가는 거의 없다. 라팽은 오는 23일부터 친족 성폭력을 다룬 연극 '유리알 눈'을 산울림 소극장 무대에 올린다. 시놉시스만 읽어보면 연출가도 배우도 진지하고 심각할 것 같은 데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아이처럼 해맑았다. 또박또박 말하는 한국어 실력도 뛰어났다.

"쉬운 주제는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코믹한 요소도 넣고 싶었죠.대신 연습에 한창인 배우들이 매일 저를 보면서 탄식을 해요. 도대체 내가 맡은 이 인물은 좋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고,왜 이리 나쁜 놈이냐면서요. (웃음)"

한국에 산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프랑스 몽펠리에대에서 유학 중이던 임혜경 숙명여대 불문과 교수와 연극 동지로 지내면서 맺은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왔다. 그는 임 교수와 함께 장 뤽 라갸르스,소니 라부 탄지,미셀 마크 부샤르 등 많은 불어권 작가를 국내에 알려왔다. 한국을 프랑스에 알리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최인훈의 희곡을 불어로 번역하고 연구해 파리7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어요.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 작품 중에는 제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죠.임혜경 교수와 본격적으로 극단 프랑코포니를 만들고 무대를 연출하기 시작하니까 이윤택 선생님이 '순진한 여자들이 진창에 빠져들었다'며 축하 겸 걱정을 해주더군요. "

극단 프랑코포니는 불어권 희곡을 소개하고 무대화하는 단체.2009년 공연된 연극 '고아 뮤즈들'을 시작으로 프랑스어권의 현대극을 찾아 번역하며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이번 작품 '유리알 눈'은 캐나다 퀘백의 불어권 극작가 미셸 마크 부샤르의 2009년 작품.'고아 뮤즈들''거위이야기'와 함께 대표적인 가족 3부작으로 꼽힌다. 이 작가의 작품은 9개국에서 영화,연극 등으로 만들어질 만큼 밀도가 높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성폭력에 시달렸던 딸과 이를 은폐하려는 가족들이 빚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파헤침으로써 친족 성폭력의 불편한 진실을 고발한다. 극중 배경은 캐나다 인형 장인인 다니엘의 작업장.그가 최고 권위에 올랐다는 것을 공표하는 기자회견 전날,미모의 여인 펠로피아가 집으로 찾아온다. 그녀는 다름 아닌 15년 전 집을 떠난 막내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성폭력에 시달렸던 그녀는 성인이 된 뒤 성형수술을 하고 가족 곁으로 돌아와 처절한 복수에 나선다.

라팽은 "좀 더 들여다 보면 이 연극은 현대인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고정관념과 위선을 벗겨내는 데 무게를 둔다"고 설명했다.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