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시댁 스트레스 효과'…명절에 금목걸이 판매 '불티'

홈쇼핑 방송편성의 비밀

설 다음날 순금체인 10억 판매…여성 속옷ㆍ운동기구 판매 급증
귀가 늦는 '남편 스트레스' 등 여성들의 '자가치료형' 소비 겨냥
설 다음 날인 지난 4일 직장인 L씨는 늦은 아침을 먹고 아내와 TV 앞에 앉았다. 전날 늦게까지 시댁에서 명절을 보낸 아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채널을 돌리던 L씨는 TV편성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공중파 중간 중간에 끼어 있는 홈쇼핑 채널에서 대부분 여성용 제품을 방송하고 있는 것이었다. L씨는 "왜 연휴에 여성용 제품만 판매하지?"라고 물었다. 아내는 L씨를 째려보며 "무식하긴 저게 다 상술이야.시댁에서 스트레스 받았으니까 쇼핑하면서 풀라는 거지"라고 쏘아붙였다. '시댁 스트레스를 이용한 마케팅',이 말은 과연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까울까. ◆한 시간에 10억원어치 팔린 순금 체인

홈쇼핑 GS샵은 지난 4일 오후 12시15분, 순금으로 된 고가 체인 판매에 나섰다. 목걸이와 팔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이 제품의 이름은 '아모르 24K 순금 체인'으로, 하나에 88만원부터 비싼 것은 250만원까지 했다. 여기에 천연자수정 3캐럿 목걸이 · 귀걸이 세트 등을 사은품으로 내걸었다. 타깃은 분명했다. 설날 음식과 차례는 물론 시댁에서 다양한 일로 신경을 많이 써 지친 아내들이었다. 정오 시간대를 선택한 것은 이때가 늦잠을 자고 일어났거나 늦은 아침을 먹은 직후 여유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또 고가인 만큼 남편과 함께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배려(?)도 깔려 있었다.

명절은 전통적인 홈쇼핑 비수기다. 편성팀은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홈쇼핑 주 고객인 주부들이 명절 준비로 지출이 커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TV시청 시간도 길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방송이 시작되자 문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오후 12시15분부터 1시15분까지 단 한 시간 사이에 무려 500여개가 팔려 나갔다. 금액으로는 10억원어치에 달했다. 평소 황금시간대에 편성된 고가의 전자제품도 많이 팔리면 7억~8억원어치 정도다. GS샵 관계자는 "전적으로 시댁 스트레스에 따른 구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체인 매출에 상당 부분 (시댁 스트레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홈쇼핑 명절 여성용 제품 집중 편성실제로 GS샵은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 '아내 기살리기'란 제목 아래 특집 방송을 편성했다. 롯데홈쇼핑도 '엄마 만세'(4일),'여자 만세'(5일) 등 여성고객용 상품을 주요 시간대에 배치했다. 6일 오후 3시30분에 명절 스트레스로 지친 주부들을 겨냥해 판매한 '최화정 마스크시트'(100장 · 8만9000원)는 평상시의 두 배 이상인 3억5100만원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윤지환 롯데홈쇼핑 마케팅팀장은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주부 고객을 위한 상품을 집중 편성했다"며 "작년 연휴 때에 비해 매출이 40%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현대홈쇼핑에서는 14만9000원짜리 여성용 속옷(퀸즈라보바디쉐이퍼)이 지난 3일 밤 한 시간 만에 2400개,3억2000만원어치가 팔려 나갔다. 이는 평일에 비해 20%가량 많은 규모였다.

◆한국인의 소비는 자가치료형정신분석학자이자 컨설턴트인 클로테유 라파이유는 미국인의 소비 코드를 '세상과의 재결합'이라고 규정했다. 쇼핑을 통해 여성들은 가정에서 빠져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사회적 경험을 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쇼핑은 즐겁고 신나는 모험이며, 새로운 스타일과 유행 등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서부개척 시절 농가에서 일하고 집에서 살림을 하던 여성들이 세상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읍내로 음식을 사러갈 때였다는 얘기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또 프랑스인의 소비 코드는 '문화 배우기'라고 정의했다.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함께 쇼핑을 하며 '빵 포도주 치즈를 동시에 구입하는 이유'와 '어떤 빛깔과 무늬가 잘 어울리는지'등을 가르치는 프랑스의 쇼핑문화를 표현한 것이다. 쇼핑이 문화를 가르치는 학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절 때 시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마케팅에 활용하고, 새벽까지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둔 주부들을 겨냥해 새벽 2시께 수백만원짜리 모피코트를 편성하는 홈쇼핑업체들은 어떤 코드를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의 글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하 교수는 '도시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지름신의 유혹에 빠진 사람 중 일부는 자가치료자들"이라고 말한다. 우울한 느낌을 술로 푸는 사람이 있듯이 기분이 울적할 때 돈을 써 기분을 돌려놓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런 치료는 실제 항우울제보다 강력한 효과가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또 고가의 제품이 팔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작은 사치'라는 미국 트렌드 분석용어를 도입해 설명했다. '작은 사치'는 심리적 만족을 위해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고가품을 사려는 21세기 트렌드를 뜻하는 말이다.

김용준/강유현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