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바이오시대 키워드는 '융합'

경쟁국 앞서 '지원연구단' 발족…인접 분야 아우를 때 결실 기대
노벨상 수상자이자 바이오학자인 필립 샤프를 비롯한 12인의 MIT 석학들은 올해 1월 '생명과학,물리학,공학의 융합'이라는 백서를 내놓았다. AAAS(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가 주관하는 포럼에서 발표된 이 백서는 생명과학에서 1차 혁명으로 간주되는 분자세포생물학의 발전,그리고 2차 혁명인 인간게놈지도의 완성에 이어서 '융합(convergence)'은 제3의 혁명으로서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예측했다. 특히 생명과학의 융합을 가장 첨예하게 만드는 투자야말로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현명한 투자라고 역설했다.

최근 융합이라는 단어가 여러 곳에서 회자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융합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실제 활용하고 있는 사례는 아직 드문 것 같다. 융합이란 단순하게는 여러 그룹간의 협동적 작업을 의미할 수 있으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을 뜻한다. 즉 기존의 학문체계에서는 서로 분리되고 심지어는 상충돼 보이기까지 하는 기술,과정,장비,아이디어들을 통합해 실질적으로 하나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융합기술 혁명은 이미 IT에서는 현실화해 스마트폰은 이제 일상생활의 분신처럼 됐으며 현대 사회의 생활 양식을 급격히 변화시키고 있다. 이제 융합기술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생명과학 분야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이런 움직임은 바이오 시대의 현실화를 크게 앞당길 것으로 기대된다. 불과 30여 년의 역사밖에 안 되는 분자생물학과 게놈 혁명은 지난 수백년간 해결하지 못했던 생명 현상의 문제들을 풀어주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생명현상의 복잡성에 비교할 때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인간 생로병사의 비밀을 이해하려면 훨씬 복합적이고 혁신적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바이오 분야에서 융합연구는 질병치료,에너지,환경 등 여러 분야에 다양하게 접목될 수 있으나 특히 질병 치료분야에서의 연구가 두드러진다. 대표적으로 질환부위만을 선택적으로 치료하는 약물의 개발,체내에서 원하는 시간과 위치에서 약물 방출을 조절하는 기술,질병의 진단 및 예측을 위한 모델 개발 등의 분야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MIT의 석학들은 이번에 발간한 백서를 통해 바이오융합 연구 활성화를 위해 미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곧 불어닥칠 폭풍 같은 변화에 앞서,우리나라는 다행히도 작년 말 교육과학기술부 글로벌프런티어사업을 통해 '혁신형 의약바이오컨버전스연구단'을 발족했다. 현재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바이오융합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지만 이같이 질병과 치료제 분야를 중심으로 바이오융합 연구를 지원하는 국가지원 연구단의 발족은 전 세계적으로 아직 사례가 없는 것이다. 지난 30여년간 1,2차 바이오 혁명기를 거치는 동안 한 번도 새로운 변화에 이니셔티브를 가져보지 못한 대한민국이,이제 제3의 혁명인 바이오융합기술 연구에서만큼은 한발 앞선 선택을 한 셈이다.

그러나 출발이 앞섰다고 결과도 선두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투자의 규모와 국가적 인프라가 앞선 선진국에 뒤지지 않으려면 진정한 의미에서 '융합과 소통'이 가능한 연구 환경과 문화의 구축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즉 다가오는 바이오융합시대에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야를 조금 내려놓고 다른 목소리에 열린 마음을 갖는 실천적 행위,이것이 융합연구 성공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이런 환경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융합은 한갓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융합연구는 과학의 혁명이자 문화운동이다.

김성훈 <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의약바이오컨버전스연구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