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Trend][Best Practice] 셀 생산의 원조 캐논, 컨베이어 버리고 '가라쿠리' 도입…생산 75% 늘고 품질도 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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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라쿠리 = 인력으로 움직이는 일본식 기계 >"가라쿠리(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일본식 기계) 방식이 캐논의 셀 생산성을 견인하는 원동력입니다. 작업하는 사람이 현장에서 얻은 지식(low-tech)을 이용해 기계(high-tech)를 효율적으로 제어하는 것이죠."(사카타니 사토시 오이타공장 담당자)
기능공, 팀 이뤄 조립 작업
위기 때 R&D 투자 비율 늘려 카메라 사업ㆍ광학 기술에 집중
8ㄴ녀 연속 최고 여업이익 경신
세계 최대 카메라 업체 캐논의 공장 가운데 '셀 생산 표준'으로 불리는 일본 오이타 공장.이달 초 한국 언론에 처음 공개된 카메라 조립실에 들어서자 살아있는 세포처럼 움직이는 셀이 눈에 들어왔다. 25개의 셀에 각각 배치된 숙련공들이 기계와 팀을 이뤄 14~18단계를 거쳐 하나의 완제품을 만들어 낸다. 정밀작업은 인간의 손으로 하고,완제품을 나르고 부품을 공급하는 단순작업은 로봇이 맡는다. 셀에 속하는 팀원 스스로 작업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이를 곧 현장에 반영할 수 있어 효율이 계속 향상되고 있다고 사카타니 담당자는 설명했다. 셀 생산은 1998년 캐논이 최초로 도입해 일본은 물론 한국 등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생산혁신 기법이다. 캐논이 2003년 이후 전 세계 카메라 판매 점유율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오는 비결의 하나로 꼽힌다. 광학기술 분야에서 90여년의 경험과 기술을 축적했지만 연구 · 개발(R&D)에 끊임없이 투자하고,'잘할 수 있는 사업'에 집중한 전략도 "불황과 엔고에 허덕이는 일본 업체들 사이에서 캐논의 성장이 돋보이는 이유"(월스트리트저널)다.
◆셀도 혁신한다
오이타 공장 작업실에서는 기둥도 전기 · 배기 장치도 찾아 볼 수 없다. 셀 생산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기 위해 시공단계부터 기둥을 없앴기 때문이다. 전기 및 배기 장치는 모두 마루 밑에 깔았다. 덕분에 제품의 기종과 수량에 맞춰 셀의 레이아웃(작업대 배열)을 바꾸기가 쉽다. 2004년 오이타 공장을 시작으로 이후 세워진 캐논의 공장은 모두 이 같은 방법을 적용했다. 셀 생산은 혼자 또는 몇 명의 기능공이 소규모 팀을 구성해 모든 공정의 조립 작업을 직접 수행하는 방식이다. 수십 명의 직원이 정해진 자기일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컨베이어방식과 비교할 때 작업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생산 효율이 극대화되는 게 장점이다. 생산환경의 변화나 발전에 따라서 큰 설비투자 없이 유연하고 다양하게 생산시스템을 재구성할 수 있어 운전자본 절감효과도 높다. 미국 경제지 포천은 "캐논은 셀 방식 도입 후 재고비용이 크게 줄고,시장의 요구에 빠르게 대처해 경쟁업체보다 먼저 신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캐논은 셀 방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2000년부터 8년 연속 사상 최고 영업이익을 경신했다.
오이타 공장은 작업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비능률적인 요소는 제거하고 아이디어는 적극 반영해 셀의 효율성을 높여왔다. 셀 안에서는 무게 추 역할을 하는 작은 물통이 달린 선반을 통해 제품을 다음 단계로 자동 전달한다. 작업자가 손으로 전달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직접 고안한 장치다. 작업장 곳곳에 반영된 이 같은 '가라쿠리' 덕분에 일부 전문가용 카메라의 경우 1인당 생산대수가 2009년 25.7대에서 지난해 45대로 75% 급증하는 등 높은 생산성 제고 효과를 거뒀다.
◆매출 줄어도 R&D 비중은 늘려캐논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3875억엔(약 5조2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80% 가까이 늘었다. "핵심사업인 카메라 부문,그 중에서도 렌즈교환식인 일안반사식(DSLR) 카메라의 판매 호조로 엔고 여파를 비교적 잘 이겨냈다"(블룸버그통신)는 평가다.
"캐논이 카메라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건 불황 속에서도 과감한 R&D투자를 했기 때문이다"(니혼게이자이신문).캐논은 일본 전자기업 가운데 매출 대비 R&D투자 비중이 가장 높다. 일본 경제가 장기 불황에 접어든 1990년대 이후 재무상황이 악화되자 대부분 기업이 R&D 비용 삭감에 나섰지만,캐논은 적극적인 투자로 기술격차를 늘려갔다. 2000년 이후에도 꾸준히 7~9%대의 투자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고공행진을 이어오던 성장세가 엔고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크게 흔들린 2009년에도 R&D투자 비율은 2008년 9.1%에서 9.5%로 오히려 늘었다. 덕분에 캐논은 10여년간 미국 특허등록 순위에서 세계 5위권을 지켜오고 있다. ◆잘하는 것만 확실히 한다
캐논은 1933년 설립된 정밀광학연구소를 모체로 카메라 사업을 시작한 이후 꾸준히 광학 핵심 기술에 집중해 왔다. '왼손에 카메라,오른손에 사무기'라는 슬로건 아래 광학 기술의 강점을 바탕으로 복사기,프린터 등 인접분야 사업을 확대하며 한 우물 파기에 집중했다. 마쓰시타,소니 등 대다수의 일본 전자기업들이 AV기기,가전에서 반도체,휴대폰,엔터테인먼트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지만 캐논은 흔들리지 않았다.
핵심역량에 집중한 전략은 1990년대 장기 불황에 빛을 발했다. 핵심역량과 관계 없는 PC,LCD(액정표시장치) 등 7대 적자사업은 과감히 접고 복사기,프린터와 디지털 카메라 사업에 집중 투자해 시장선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기술기반이 철저히 확보되지 않은 사업은 성장 가능성이 높아도 과감하게 철수,확립된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기존 사업의 성공확률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LG경제연구원).금융위기의 역풍을 맞은 2009년을 제외하고 최근 10여년간 10%대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유지하고,'2010년 일본 최고의 기업'(니혼게이자이신문)으로 선정된 원동력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평가다.
오이타(일본)=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