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개헌논의 '그들만의 리그'는 안돼

국정현안 떠올랐지만 국민 소외
학계·사회단체 의견부터 수렴을
개헌 문제가 갑자기 국정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개헌 전도사를 자임하며 개헌의 당위성을 알리느라 여념이 없던 이재오 특임장관은 엊그제 '금년에 개헌을 하지 않고 대선 정국이 조기에 가열되면 남은 임기 국정 운영에 중대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경고성 발언까지 내놓았다. 21일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가 개헌특위를 만들기로 의결하자 자신의 소임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개헌 문제가 궤도에 오르려면 아직도 갈길이 멀다.

개헌이란 화두는 여야 각당,그리고 당내에서조차 계파 간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사안이다. 야당,특히 민주당은 다른 무엇보다 개헌의 블랙홀 효과,즉 다른 모든 정치쟁점들을 삼켜버리는 흡인력 때문에 개헌에 동조하려 들지 않는다. 현재 의석 배분상 국회의 개헌의결에 필요한 200명의 정족수를 채우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개헌론자들은 국민 과반수가 개헌 필요성을 시인한다고 지적하지만,어차피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일은 없다고 여기는 탓인지 국민은 개헌 논의과정에 초대조차 받지 못한다. 손님도 아닌 방관자처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국민 입장에선 시선이 냉랭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개헌 문제에서 물러설 뜻이 없는 듯하다. 이 장관의 발언을 선의로 이해한다면 지금 개헌을 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금년이 아니면 개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개헌은 필요하고 이는 이미 전 정권에서 여야가 합의한 사항이며 이명박 대통령 본인도 거듭 밝혀온 바라는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수긍이 간다. 대통령 지지율과 상관없이 이미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 터에 개헌같이 중량급 현안을 임기 4년차에 못하면 결국 못하는 게 아닌가.

문제는 과연 지금 이 시점에서 개헌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야당의 입장에서는 정권 탈환의 전기를 잡기 위해 한시도 아까운 터에 임기 4년차를 개헌문제로 주도권을 뺏기기 싫을 것이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22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개헌은 실기했고 명분도 없다"고 못박았다. 더구나 이 대통령이 지향하는 이른바 기후변화,남북관계,남녀평등 등 미래이슈를 포함한 새로운 시대상을 담은 '통큰 개헌'이라면,이미 연구를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합의 도출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개헌이 성사될 수 있으려면 개헌 문제를 다른 정치현안과 분리,절연시켜 개헌이 수반할 정치적 효과를 최소화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행인 것은 차기 대선은 현행 제도대로 치르자는 데 비교적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치적 불확실성을 해소할 방안이 더 나와야 한다. 누구보다도 이 대통령 스스로 또는 한나라당을 통해 개헌안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이야기하듯 예단 없이 제로베이스에서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놓겠다는 식으로는 오히려 의구심과 불신을 키울 수 있다. 미리 명확한 일정을 정하되 차기 대통령선거와 동시에 개헌안을 확정하도록 조정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개헌은 국회가 중심이 돼 추진하는 게 정도지만 국회뿐 아니라 학계,시민사회단체,종교계 등을 망라한 범국민적 개헌논의기구를 통해 개헌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개헌은 '원 포인트'여서도 안 되고 범정파적 합의가 가능한 미래이슈들을 반영한 것이 돼야 할 것이다. 건국 이후 총 9차례 개헌이 있었지만 주로 권력구조를 고치는 '정치인들만의 게임'이었다. 정작 주권자인 국민은 개헌과정에서 제대로 초대받지 못했다. 개헌을 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 관건은 대통령,여야 또는 차기 대권주자 모두가 진정 나라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을 위해 당리당략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홍준형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