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정주영 회장 10주기] 맨손으로 일군 '현대신화'…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起業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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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꽃 같은 86년의 삶#1.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53년 대구와 경남 거창을 잇는 고령교 공사를 맡았을 때다. 계약 조건은 공사 기간 26개월에 공사비 5478만환.하지만 대형 공사를 처음 수주하는 터라 장비가 부족했다. 게다가 자재값도 폭등해 있던 상황이었다. 임원들은 포기하자고 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기업인은 주판을 엎고 일할 때도 있다"며 밀고 나갔다. 이 공사에서만 7000만환의 손실을 봤다. 위기는 기회가 됐다. 정 명예회장의 신용에 감동한 정부가 대형 프로젝트를 잇따라 맡겼다. 현대건설은 10년도 안돼 건설업계 1위로 올라섰다.
근면ㆍ신용으로 창업 기틀
건설…조선…車…숨가쁜 질주
'소떼방북' 통일의 꿈 되살려
#2.1976년 2월16일.정 명예회장이 사우디아라비아 체신부의 국제입찰실에 들어섰다. '20세기 최대 역사'로 불린 주베일항 공사 입찰서를 제출하기 위해서다. 주변에선 무모한 도전이라고 수군거렸다. 컨소시엄 구성에 끼워줄테니 입찰을 포기하라는 유혹도 받았다. 정 명예회장은 단독 응찰을 강행했다. 결과는 공격적인 입찰가를 써낸 현대의 승리였다. 정 명예회장은 10년 전인 2001년 3월21일 86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가난한 농가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숱한 역경을 딛고 굴지의 대기업을 일궈냈다.
머릿속에는 늘 '산업보국(産業報國)'이란 네 글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1985년 1월 계열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업은 이익이 우선이긴 하지만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최고경영자가 자신이 하는 일이 국가발전 성취에 이바지하는지를 올바로 생각한다면 설혹 일시적인 패배가 있을지라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
◆"상인에겐 신용이 첫째야"정 명예회장이 처음 가출한 것은 16살 때였다. 계기는 신문에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 '흙'이었다. 소설을 읽기 위해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구독하는 집으로 밤마다 2㎞씩 달렸다. 소년 정주영은 소설 속 주인공(허숭)과 같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소 판 돈 70원을 갖고 집을 나갔다. 상경 후 독학하며 공부했지만 보통고시에서 낙방했다.
부친의 설득으로 돌아온 그는 세 번 더 가출했다. 마지막으로 집을 나갔을 때 겨우 정착한 곳이 서울 원효로 쌀가게인 복흥상회였다. 전차 삯 5전을 아끼기 위해 새벽에 걸어 출근했고,구두가 닳는 것을 막으려고 징을 박고 다녔다. 배달은 물론 청소와 장부 정리까지 깔끔하게 해내자 22살이 됐을 때 주인이 가게를 넘겨줬다. 주인은 곡물을 팔아 천천히 대금을 갚도록 했다. '상인에겐 신용이 첫째'라는 경영철학을 그때 터득했다.
정 명예회장은 이후 자동차 합자회사인 '아도서비스'를 설립했다. 해방 후엔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현대건설 전신)을 잇따라 창업했다. 그가 '건설 부흥기'를 거쳐 자동차와 중공업 분야에 본격 뛰어든 것은 1960년대 말이다. 1971년 239억원이던 그룹 매출액은 3년 후인 1974년 1204억원으로 1000억원을 돌파했다. 다시 3년 후인 1977년엔 1조3278억원으로 10배 뛰었다. ◆"현장에서 답을 구하라"
정 명예회장은 현장을 중시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직접 뛰면서 답을 구했다.
주베일항 공사 때의 일화다. 공사 과정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이 16만개나 필요했다. 트럭에 실려온 콘크리트를 거푸집에 붓기 위해 150t짜리 크레인 다섯 대를 동원해도 하루에 200개밖에 만들 수 없었다. 정 명예회장은 "트럭의 콘크리트를 왜 직접 거푸집에 붓지 않느냐"고 물었다. "콘크리트 배출구가 거푸집보다 너무 낮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즉시 믹서트럭의 배출구를 거푸집보다 높이도록했다. '완제품인 트럭은 개조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이렇게 하자 생산량이 하루 350개로 늘어났다. 남산 3호터널 앞에 있는 20층짜리 옛 전국경제인연합회 빌딩을 지을 땐 신축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남산 중턱에 고사포대가 자리잡은 탓이었다. 직원들이 "부지를 옮기거나 10층짜리로 낮춰 지어야 한다"고 했다. 정 명예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포대를 20층 건물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주면 되지 않겠나. " 군부대에선 이 아이디어를 반겼다.
◆"통일 위해 혼 태우겠다"
1998년 6월 83세의 나이에 정 명예회장은 소 500마리를 트럭 50대에 나눠 싣고 판문점을 통과하는 '세계적인 이벤트'를 연출했다. "이제 그 한 마리가 1000마리의 소가 되어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강원 통천)을 찾아갑니다. 남북 간 화해를 이루는 초석이 되길 바랍니다. "정 명예회장의 방북 과정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며 수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프랑스의 문명 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그의 '소떼방북'을 가리켜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