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紙의 심연 모르고…겁 없이 찍다 후회했죠"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감독

101번째 영화…전통한지 담아내
구도적 노력과 세속적 욕망 교차
"꼭 남기고 싶어 절박하게 촬영"
전통 한지(韓紙)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17일 개봉)는 임권택 감독(75)의 101번째 연출작이자 첫 디지털영화다. 구도자의 수행과 생활인의 세속적인 욕망을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들며 표현했다. 판소리를 다룬 '서편제',동양화의 세계를 그린 '취화선'에 이은 또 하나의 전통문화 시리즈로,거장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총 제작비는 25억원이며 전주시와 전주국제영화제가 메인 투자자로 참여했다.

임 감독은 "한지를 소개하면 어떠냐는 민병록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제안을 받고 뛰어든 지 3년 만에 완성했다"며 "누군가는 이런 영화를 후배들에게 남겨줘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찍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임진왜란 때 불탄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 보관본을 전통 한지로 복원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승진을 제때 못한 공무원 필용(박중훈)은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시청에서 추진 중인 한지사업에 매진한다. 그의 바람기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 아내(예지원)는 그가 늦게 귀가하는 것을 의심하며 잔소리를 한다.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감독 지원(강수연)은 한지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캐려 한다. 이런 지원과 필용은 사사건건 충돌하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조금씩 거리를 좁힌다.

"1년 이상 취재하면서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한지에 얽힌 생활문화를 다 따라가려면 한도 끝도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한지가 얼마나 좋은 종이이며,왜 한지를 되찾아야 하는지에 집중했습니다. "

그러나 한지를 영화화하는 건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한지에 얽힌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던 탓이다. 심지어 촬영이 끝난 시점에도 새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한지라는 광활한 세계에 섣불리 도전장을 내민 것이 후회스러웠다고 했다. "한지의 깊고 넓은 세계를 영화화하겠다며 겁도 없이 대든 셈이죠.굉장히 후회했지만 이런 깊은 세계의 한 부분을 영화로 담을 수 있었던 것이 영광이었습니다. "

영화는 한지에 대해 설명하는 데 상당 분량을 할애한다. 한지 홍보영화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혼합해 놓은 것이다.

"강수연 씨가 극영화를 찍는지 다큐멘터리를 찍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여러 가지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한지를 찬양하는 것은 저의 자발적인 의지였습니다. 군사정권 때처럼 정권이 요구하는 소재나 주제가 아니었지요. "이번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까. 임 감독은 "우리 문화를 너무 인위적으로 드러내는 데서 오는 불쾌감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지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깊은 산골에서 새벽 기도를 올리는 구도자 같은 노력을 포착한다. 반면 지원금을 많이 차지하기 위해 서로 뜯고 할퀴고,남녀 간 정념을 불태우는 모습도 곁들여진다. 이에 대해 그는 "여러 사람의 감정을 가감없이 담아내려 했다"고 설명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