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국왕…말더듬증 치료약은 '무한 신뢰'
입력
수정
오스카 4관왕 '킹스 스피치'"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청산유수구나.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청중을 상대로 유창하게 연설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보던 '말더듬이' 영국 국왕 조지 6세(콜린 퍼스)는 이렇게 탄식한다. 대중 앞에만 서면 말문이 막히는 자신과는 딴판이어서다. 말더듬증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조지 6세는 마침내 어눌하지만 진정성 있는 연설을 해낸다. 오늘날 히틀러는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있지만 조지 6세는 영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올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남우주연상,각본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한 '킹스 스피치'는 두 실존인물을 비교하는 이 장면을 통해 말을 잘한다는 의미를 되묻는다. 그것은 오로지 진심을 얼마나 잘 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고.당사자들의 고민과 상관없이 더듬거나 떨거나 하는 습관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교훈이다.
아이러니는 또 있다. 언어치료사 로그(제프리 러쉬)는 말하는 스킬을 가르치기보다는 국왕의 진심을 듣는 데 열중한다. 상대방이 정말로 듣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전달함으로써 화자가 자신감 있게 말하도록 이끌어내는 것이다. 톰 후퍼 감독의 이 영화는 조지 6세의 말더듬증을 치료하는 과정을 뛰어난 코미디로 그려낸 걸작이다. 혀 풀기,얼굴근육 풀기,춤추거나 노래하며 말하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치료하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큰 웃음을 준다. 또한 말더듬증을 치료하기 위해 화자와 청자 간에 신뢰와 평등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도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다.
평등은 격식을 파괴하는 데서 비롯된다. 로그는 조지 6세를 집안에서 쓰는 이름 '버티'라고 부른다. 국왕의 권위를 깨부수는 것이다. 국왕이 즐기는 담배도 자신의 집에서는 못 피우게 빼앗는다. 다른 문제를 주고 동동한 조건으로 '내기'를 걸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국왕과 로그는 친구가 된다. 국왕은 '친구' 앞에서는 자신감을 갖고 말한다.
또한 신뢰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데서 생겨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로그는 국왕이 자신에게 언어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로그의 이런 태도를 목격한 국왕이 그를 신뢰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왕의 말더듬증은 인간 간 신뢰관계가 깨졌을 때 비롯됐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어린시절 형과의 비교,부친의 엄격함,유모의 학대 등이 겹쳐져 스스로 내면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