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일본 경제가 멈췄다] 도호쿠~도쿄 긴급르포, 차병석 특파원 무박 3일

"쾅…덜컹덜컹 " 건물 붕괴 공포…그래도 그들은 차분했다

호텔 순식간에 단전·단수…도로·통신 모두 마비
여진 대비 복도서 새우잠
슈퍼·편의점 앞엔 난민 행렬…시민들 항의·약탈 전혀 없어
라디오선 "아이가 못나왔어요"
"쾅…덜컹덜컹…." 갑작스런 충격음과 흔들림에 놀라 침대에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12일 새벽 4시40분.호텔방 냉장고 위에 놓인 물컵이 쓰러질 정도로 진동은 심했다. 본능적으로 복도로 뛰어나가 비상계단을 통해 6층 객실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1층 로비엔 공포에 질려 잠옷 바람으로 뛰쳐 나온 투숙객들로 가득했다. 오전 5시께 호텔 직원이 배달된 조간 신문을 벽면에 붙였다. 1면 톱제목은 '센다이에서 사체 200명 넘어'란 충격적 소식이었다. 센다이에서 아키타시로 출장을 왔다는 회사원 이토 준이치 씨(46)는 "어제(11일) 지진 이후 가족들과 전화통화가 전혀 안되고 있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일본 열도를 강타한 사상 최악의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기자는 핵심 진원지이자 최대 피해지역인 미야기현 바로 옆에 있는 아키타현 산업시설에 출장 중이었다. 진원지 부근에서 경험한 이번 지진과 쓰나미, 잇따른 여진은 기자가 그동안 도쿄에서 간헐적으로 느꼈던 지진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축을 뒤흔든다'는 표현이 실감날 정도였다. 호텔 매니저인 히라카와 유지 씨(62)는 "일본 침몰이란 영화가 생각난다"며 "태평양전쟁 당시 피폭 이후 최대 재앙"이라고까지 말했다.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지진에 일본 전체가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질서 있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정전으로 '암흑과의 전쟁'

지난 11일 오후 2시46분 규모 9.0의 첫 강진이 발생했을 때 기자는 아키타 명주(名酒)인 다카시미즈 니혼슈공장을 취재 중이었다. 이 회사 본사 3층에서 설명을 듣고 공장라인을 돌기 위해 일어서려는 순간 건물 전체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책상이나 벽을 잡지 않고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실내 전등이 꺼지고 진동은 1분 이상 지속됐다. 이러다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가 엄습했다. 취재에 응하던 모로하시 마사히로 다카시미즈사 사장(61)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이런 지진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전으로 공장 취재를 포기하고 호텔로 향했다. 신호등마저 꺼져 도로의 자동차는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차창 밖으론 어디선가 불이 난 듯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평상시면 자동차로 10분 만에 도착할 거리였지만 3시간이 걸려 가까스로 호텔에 도착했다. 그러나 해가 진 이때부터 '어둠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갑작스런 강진으로 아키타시 전체가 정전돼 '암흑의 도시'로 변했다. 촛불로 밝힌 프런트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했지만, 캄캄한 방엔 들어가도 소용이 없었다. 난방은 물론 TV도 나오지 않았다. 목욕탕 화장실도 단수됐다. 휴대폰도 불통이었다. 시내 식당은 물론 슈퍼마켓 편의점 등이 모두 문을 닫았다. 저녁식사는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외부로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에 연결해 지인들에게 안부를 알리는 것뿐이었다. 이날 밤 상당수 일본 투숙객들은 여진에 대비, 객실에 들어가지 않고 복도나 로비에서 담요를 덮고 새우잠을 잤다.

◆항공 철도 도로 불통…24시간 고립

지난 12일 오전 5시 조금 넘어 동이 트자마자 호텔을 나섰다. 최대 피해지역인 미야기현 센다이에 진입하기 위해 먼저 아키타역으로 갔다. 그러나 지진 영향으로 이날 신칸센을 포함해 모든 철도편은 운행이 중단됐다. 강한 여진이 지속되는 아키타현을 탈출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렸지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베에서 친구들과 온천 여행을 왔다는 야수자와 유키 씨(여 · 58)는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의 '악몽'이 생각나 일정을 단축해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며 불안해 했다. 기자는 철도를 포기하고 택시로 50분을 달려 아키타공항에 갔다. 하지만 공항 상황은 더 나빴다. 전력 부족으로 인한 정전으로 공항은 거의 폐쇄 상태였다. 이날 아키타공항에서 센다이 도쿄 나고야 등 다른 도시로 나가는 12편의 항공편은 모두 취소됐다. 공항 직원은 "지진으로 원전 가동이 중단되면서 병원 등 비상시설에만 한정적으로 전기가 들어간다"며 "공항에도 전력이 부족해 관제탑이 가동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속도로 이곳저곳이 파괴돼 자동차 이동도 불가능했다. 센다이 진입을 포기하고 아키타 시내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길가에 있는 슈퍼마켓과 편의점엔 빵 · 라면 등 비상 식량을 사려는 수백 명의 긴 '난민'행렬이 눈에 띄었다.

◆"살아만 있어다오" 라디오로 가족 찾아이날 오후 2시 취재 대상이었던 다카시미즈사의 협조로 버스를 구해 탈 수 있었다. 아키타를 출발, 야마가타 니가타 사이타마 등을 거쳐 도쿄로 들어가는 버스였다. 일본 동북지역과 도쿄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는 상당수 지진으로 파괴돼 그나마 온전한 국도를 구불구불 돌고 돌아 도쿄로 향했다. 도로에 일반 차량은 거의 없었고, 소방차 구급차 등만 사이렌을 울리며 피해지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역 라디오 방송에선 가족과 친구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특별 방송이 흘러 나왔다. 시민들이 "살아만 있어라.가급적 빨리 연락달라""시민회관에 대피 중이니 걱정마라"는 메시지를 라디오를 통해 전했다. 네 살짜리 딸을 보육원에 맡기고 회사에 출근했다가 지진으로 귀가하지 못했다는 주부는 방송에서 "아이가 무서워서 울 것 같은데, 딸이 좋아하는 호빵맨 만화 주제가를 틀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버스는 시속 70㎞ 정도로 안전하게 달렸지만, 중간중간 여진이 발생하면 차체가 좌우로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승객 중 동요하는 일본인은 없었다. 버스 안 TV에서 나오는 특별 구호방송은 심각했지만, 차분하게 지켜봤다. 이런 모습은 정전으로 암흑 천지였던 아키타 시내,모든 철도편이 중단된 아키타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공항에선 결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이어졌으나 웅성거리거나 항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상 초유의 재해에도 신기하리 만치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처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의아했다.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교수(재정학)는 "이번 지진사태로 인한 위기가 오랜 경기침체로 무기력증에 빠진 일본 국민들을 오히려 다시 일어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아키타현 · 니가타현=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