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전 장관 "예술을 뒤집어 봐요…창의력은 역발상에서 나오죠"

이어령 전 장관 인문학 강의 '성냥팔이 소녀는 왜…'
"문학도 양말이나 스웨터와 마찬가지로 겉에 보이는 무늬가 어떻게 짜여졌는지 보려면 뒤집어 봐야죠.그게 '구조(structure)'를 보는 것인데 진짜 의미는 거기 숨어 있어요. 여러분 스스로 문학 속에 숨겨진 생명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

14일 오후 서울 대학로 예술의집 3층 다목적홀.아담한 강의실은 120여석의 이동식 의자를 차지한 청중들로 빼곡했다. 자리를 잡지 못한 80여명은 다른 방에서 화면으로 그를 만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마련한 '우리시대 예술가의 명강의' 첫 주자로 나선 문학평론가 이어령 씨(초대 문화부 장관 · 74 · 사진)의 강연을 듣기 위해 신청한 500여명 중 선택된 이들이었다. 매월 한 차례 저명한 예술가를 초빙하는 이 시리즈에서 이씨는 '예술 뒤집어 보기-성냥팔이 소녀는 왜 죽었지?'라는 주제로 창조력과 상상력의 콘텐츠에 대해 강연했다.

이씨는 대뜸 자신이 즐겨 읊는다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예로 들었다. 앞뒤로 반복되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빼면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로 구성된 이 시는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왜 엄마와 누나를 부를까요? 엄마의 반대는 '아버지'이고 누나의 반대는 '형님'인데 이들은 어디 간 걸까요? 이 구절은 반대로 아버지와 형님의 부재를 가리키죠.즉 강변은 엄마와 누나가 있는 '젠더(gender) 공간'이에요. 그런데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곁에 없거나 그들이 돌아서서 가는 거죠.결국 그들이 없는 '부재 공간'인 겁니다. 모래에 비치는 햇살과 물이 있는 강변은 아버지와 형님이 싸우고 투쟁해야 하는 전쟁 같은 현실과 대조되는 '생명의 공간'이고요. 여기에 시각과 청각의 대비,강변과 갈잎숲으로 추정되는 수천년 이어온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삶의 터전을 상상할 수 있죠."이씨는 "어떤 참고서를 보니까 활엽수인 갈잎을 '갈대잎'으로 가르치기도 하더라"며 "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배워도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문학이 담고 있는 상상력의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소월의 '진달래꽃' 얘기도 했다. "'음치'가 있듯이 현대에는 '시치'가 너무 많아요. '진달래꽃'은 이별노래가 아니잖아요. 님이 나 보기가 역겨워 간다는 게 아니라 '~가실 때에는'이라고 가정하는 거예요. 열렬히 사랑하는 상태에서 이별을 상상하고 추정하는 거죠.'아 지금의 사랑 같으면 나를 버리고 간다고 해도 고이 보내드릴 것 같다'라는 건데 실은 역설이죠."

그는 "'아이러니(모순)'와 '패러독스(역설)'가 바로 시적 긴장을 만드는 것"이라며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동시에 밟아 마치 차가 전복되듯이 예술가들은 여러분의 머릿속에 잘 정리된 언어와 철학을 뒤죽박죽 만들어 놓고 새로운 원동력과 깨달음을 준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세 살 때부터 배운 언어(한국어)와 문학,일상을 낯설게 보라"며 "김소월과 문학가들은 구조만 보여주고 다른 건 보여주지 않는데 침묵하는 공간에서 그것을 찾아내는 건 독자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한 시간 반이 넘는 강의 내내 한번도 자리에 앉지 않은 이씨는 말미에 가서야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언급했다.

"이제는 성냥불에 몸을 녹이며 행복한 미소를 띤 채 죽은 성냥팔이 소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소녀는 엄마의 신발을 신고 있다가 그마저 벗겨져 맨발이 됐고 할머니를 떠올려요. 비정한 거리에서 성냥을 팔지 못하면 아버지한테 맞을 것이란 구절이 있죠.산업화된 노동의 공간,화폐의 세계에서 엄마와 할머니로 대변되는 따뜻함을 찾은거죠." 이 대목에서 그는 '집'은 있지만 '가정'을 잃은 현대인의 삶을 떠올려보라며 '생각하는 방법'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우리시대 예술가의 명강의' 시리즈는 소나무 사진작가로 유명한 배병우 씨의 '카메라로 그리는 수묵화 이야기'(4월4일),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의 '문훈숙의 발레이야기'(5월16일)로 이어진다. 수강료는 없으며 신청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www.arko.or.kr)나 예술가의집 홈페이지(artisthouse.arko.or.kr)에서 할 수 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