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KOREA] 1부ㆍ(3) 스마트폰·USB 나오는 시대에 천리안·플로피디스크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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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ㆍ기술 인재 10만명 키우자…1부ㆍ(3) 겉도는 초ㆍ중ㆍ고 기술교육
실험 대신 암기ㆍ주입식
어려운 개념들, 말로만 설명…학생들 갈수록 "재미없다"
기술수업 찬밥신세
"대입 과목도 아닌데 왜 배우나"…학생ㆍ학부모 기피수업 1순위
뒤떨어진 기술 교육
조립만 하면 끝나는 실습교재…문방구 '키트 교육'이 상상력 망쳐
#.'다음 중 자전거에 사용된 기계 요소가 아닌 것은? ①크랭크축 ②볼트와 너트 ③캠 ④스프링 ⑤마찰차.'
'나사의 호칭치수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①수나사의 바깥지름 ②수나사의 골지름 ③암나사의 바깥지름 ④암나사의 골지름 ⑤암나사의 안지름.'A출판사와 B출판사의 중학교 2학년 기술 · 가정 교과서(기술과 가정은 통합과목임)의 '기계의 이해' 단원에 나오는 평가문항이다. 시중에 나온 10여종의 기술 교과서가 대부분 이런 식이어서 흥미 유발은커녕 오히려 "기술은 재미 없는 과목"이란 부정적 인식만 심어준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수도권 모 중학교의 'CD · 카세트 테이프 꽂이대 만들기' 실습 시간.'스스로 생각한 제품을 만들라'는 게 수업 취지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이미 교과서부터 '1,2단 수평판(2개)=너비 540㎜ 길이 130㎜ 두께 18㎜,나사못(25개)=30㎜,사포(1장)=220번…' 식으로 제품 규격을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교재를 만드는 회사는 수업 시간에 사용할 실습 재료를 반(半)제품 형태로 학교 앞 문방구에 공급한다. 학생들은 이걸 사다 조립한 뒤 못질과 사포질만 몇 번 하면 '실습 끝'이다. 이 학교 기술담당 교사는 "모두 똑같은 물건을 만들다 보니 못이 삐져나왔느냐,아니냐로 실습 점수를 매기는 코미디가 벌어진다"고 푸념했다.
한국의 기술 교육은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상상력이나 창의력과는 거리가 멀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과정은 거의 없다. 수업은 대부분 암기식,주입식이고 그나마 1년에 몇 차례 안 되는 실습은 사고의 독창성이 아니라 '누가 실수 없이 빨리 조립했느냐'로 평가된다. 김용근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은 "기존 제품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는 뛰어나지만 창의적인 제품은 만들지 못하는 한국 과학기술의 문제는 어릴 때부터 잘못된 기술 교육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며 "상상력을 망치는 '문방구 키트 교육'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진국 어디에도 문방구 실습 교재로 실습을 마치는 곳은 없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교사들도 이런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다. 김인용 경기 광주 곤지암중 교사(전국기술교사모임 회장)는 "학생 스스로 직접 뭔가를 만들거나 부숴 보면서 기술에 흥미를 느끼고 창의성도 키울 수 있는데 우리 교육은 그런 환경이 전혀 아니다"고 꼬집었다. 전석천 서울 숭문고 교사(전국과학교사협회 회장)도 "초등학교는 교사의 전문성 부족 때문에,중 · 고등학교는 진학 문제 때문에 제대로 된 실험을 거의 못한다"며 "우수한 과학 영재가 나오기 어려운 여건"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최근 이공계 경쟁력 추락을 막기 위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나서 'STEM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과학(science),기술(technology),공학(engineering),수학(math)의 통합 교육을 통해 종합적 사고력과 창의력을 높이자는 취지다. 이정훈 서울 선린중 기술교사는 "예컨대 투석기를 만들면서 포물선 원리와 디자인,설계를 함께 배우자는 게 STEM 교육"이라며 "기술을 중심으로 수학,과학,공학 교육을 통합하는 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국내 초 · 중 · 고교에서 과학기술 교육은 '점수 따기'식으로 흐르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내에서조차 "한국 학생들의 수학 · 과학 성적은 전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왜 배워야 하는지,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자성이 나올 정도다.
특히 기술 교육은 찬밥신세다. 대학 입시 과목이 아니어서 대표적인 비인기 과목으로 꼽히는 데다 기술 전공 교사가 부족해 가정 교사가 기술을 가르치는 일도 부지기수다. 이광재 경기 일산 정발고 기술 교사는 "학부모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학교에서 안 가르치면 좋겠다'는 과목 1,2위 안에 기술이 꼭 들어간다"며 "대학에서 이공계를 전공하려는 학생도 입시 때문에 국 · 영 · 수에 매달리는 게 현실 아니냐"고 반문했다.
일부에선 "스마트폰이 나오는 시대인데 기술 교과서에는 천리안이나 나우누리 같은 텔넷(원격접속)이나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플로피디스크가 버젓이 나온다"며 기술 변화를 못 쫓아가는 기술 교과서의 문제점을 꼽기도 한다. 작년까지 주당 1시간가량이던 중 · 고등학교 기술수업 시간이 올해부터 줄어드는 것도 문제다.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학기당 이수해야 할 과목이 축소되고 중 · 고등학교의 교과 선택 자율권이 확대되자 일선 학교에서 국 · 영 · 수 중심으로 수업시간표를 짜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부가 전국 중학교의 올해 수업시간 조정 계획을 조사한 결과,기술 · 가정 과목의 경우 수업시간을 줄인 학교가 38.7%에 달한 반면,늘린 학교는 1.4%에 불과하고 59.9%는 작년과 같은 수준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하면 창의성이나 상상력 교육을 늘릴 수 있을 것"(김경희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실장)이라고 밝혔지만 일선 교사들은 "그 시간은 대부분 자습시간이 될 것"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