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Visa로 채권자 숙청…프랑스 '왕의 신용'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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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시앵레짐의 재정 실패와 혁명근대 유럽의 중심 국가,세련된 문화와 지성의 선구를 자처하던 프랑스 정부의 살림살이는 어땠을까. 파산을 거듭하던 스페인과 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다. 당시 유럽의 큰 나라들은 대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고 또 비슷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루이14세, 자기 돈처럼 재정 '펑펑'
나라빚 커지자 돈 꿔준 자금주 처형
상인·서민에 중과세…혁명 유발
전쟁이 지속되는 한 막대한 전비를 조달해야 했고,국민들에게 세금을 강요하다 보면 농민 봉기가 이어졌다. 할 수 없이 각종 차입 방안을 강구했으나 속 시원한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1648년 11월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선언,원금을 동결하고 이자를 15%에서 6%로 인하했다. 그러나 그 결과 프랑스 재정은 혼란과 부패로 얼룩졌다. 우선 국왕이 새로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졌다. 차입 이자는 30~50%에 달했지만,이는 종교적으로 금지된 고리대 수준이었으므로 장부상으로 조작해 이자를 지급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상 콜베르는 재정 문제를 확실히 개선해 프랑스의 몰락을 막는 계기를 만들었다. 1659년 스페인과의 전쟁을 끝내는 피레네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프랑스는 실로 오랜만에 평화를 맞이했는데,이 기회를 이용해 중요한 개선 조치를 단행했다.
콜베르는 우선 정부의 지출과 수입을 모두 삭감했다. 그 결과 1662~1671년 흑자 재정을 이뤘는데,이는 근대 프랑스사에서 거의 유일한 시기였다. 1672년 다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콜베르는 조세를 늘리는 대신 차입을 시도했다(1672~1678).그리고 이 부채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정부의 부담을 최소화했다. 일부 부채들은 강제 차환(借換)했고,일부는 강제로 통합하거나 상환함으로써 장기채 부담을 5200만리브르에서 800만리브르로 크게 줄였다. 이런 문제들을 관장하기 위해 새로운 기관인 차입금고(caisse des emprunts)를 설치했다.
분명 이 시기가 프랑스 재정사에서 가장 분명하게 개선이 이뤄진 때였다. 만일 이런 식의 발전이 계속 이어졌다면 프랑스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1683년 콜베르가 사망했을 때 모든 일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루이 14세는 그동안 콜베르의 '부르주아적인' 쩨쩨한 태도를 경멸했다. 국왕은 정해진 시점에 투자자에게 돈을 되갚는 방식보다는 국왕이 갚고 싶을 때 갚는 방식의 대부를 더 선호했다. 조만간 차입금고도 폐쇄했다. 정부 재정의 관점에서 프랑스가 영국과 다른 길을 간 것은 이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재정 운영 방식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국왕이 100여개의 개별 금고를 가지고 있어서 돈이 필요하면 특정 금고에 지출을 명령하는 방식이었다. 이 금고를 담당하는 사람들,심지어 직접세 세원을 관리하는 징세관들도 흔히 그 직위를 돈으로 구입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타이유 세,1/20세 등 국고로 들어가야 하는 금액을 개인들이 국왕에게 빌려주는 형식을 취했다.
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사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개인의 이해와 국가의 이해가 뒤섞였다. 결국 독직과 부정은 피할 수 없고,국가와 국민들의 부담만 커졌다. 이런 중간 매개자들을 통해 대귀족을 비롯한 부유층의 자금이 대단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국왕에게 차입된 것이다. 때때로 정권은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이런 중간 매개인들을 '숙청'했으나,그것은 늘 사태를 악화시켰다. 루이 14세의 차입은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했다. 그가 사망한 1715년 9월 정부 부채는 30억리브르에 달했다. 이 가운데 20억리브르가 장기채이고 그 이자 지급액만 매년 8600만리브르였다. 여기에 더해 9억2200만리브르의 유동공채(즉 단기채)와 그에 따른 이자 지출이 큰 부담을 주었다. 정부 수입은 이론적으로는 연 8000만리브르였지만,3년치 수입을 미리 당겨서 쓴 상태였다. '영광의 시대'라 부르던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아무런 합리적 대책이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던 것이다.
루이 14세가 사망했을 때 루이 15세는 아직 미성년자여서 오를레앙 공 필립 2세가 섭정을 했다. 이때 프랑스가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 나갔는지는 프랑스 재정의 특징,나아가 국가의 일반적 성격이 어떠한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프랑스 정부는 스페인처럼 정부가 파산선고를 하는 대신 힘을 동원해 강제로 자금주들을 억압하는 방식을 취했다.
우선 일부 채무에 대해 강제 축소와 통합을 단행하고,일부 채무는 고리대라고 우겨서 지급을 거절했다. 더 나아가 섭정은 전쟁에서 부당하게 이익을 취한 사람들을 조사해 부당 이익을 몰수하겠다며 부정부패재판소를 열었다. 이것이 '사증(Visa)'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1716년의 비밀조사위원회다. 이 위원회는 차입과 관련된 부정부패를 일소한다는 구실로 8000명을 기소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투옥,혹은 갤리선 노수(櫓手)가 되거나 벌금형을 받았다.
그들이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 하더라도 그때까지 국가가 그런 방식을 용인 혹은 사주해 오다가 느닷없이 가혹하게 처벌한 것이니 억울할 만했다. 어쨌든 이런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국가가 당장 파산 상태에 빠지는 것은 막았지만,이를 계기로 국가 신용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재정 문제는 더 이상 해결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미국의 독립전쟁에 개입해 막대한 자금을 지출했다. 특권층 귀족은 면세 혜택을 누렸고,부유한 상인들과 서민들에게만 조세 부담이 전가됐다. 국가 재정이라는 공공 부문을 여전히 징세 청부업자나 재정가(financiers) 같은 개인 업자들에게 의존함으로써 극도의 불공정성과 비효율성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을 유발한 가장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재정 문제였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