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電이 복병"…유럽 헤지펀드, 지진 후 日베팅 3억弗 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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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브르캐피털, 금융위기ㆍ유로존 위기 때 '수익'한 유럽계 헤지펀드가 대지진으로 급락한 일본 증시에 베팅했다가 3억달러(3300억원)의 고객 돈을 날리고 손절매했다. 도쿄 증시가 곧 반등할 것으로 기대하고 주식을 대거 사들였지만 예상치 못한 원전 사태로 회복이 지지부진하자 손실을 못 견디고 처분한 것이다.
'거꾸로 투자'로 재미보다 이번엔 '쓴맛'
28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스위스 제네바에 본사를 둔 헤지펀드인 자브르캐피털파트너스는 지난 11일 일본 대지진 직후 도쿄 증시에 투자했다가 3억달러의 손실을 입고 23일 주식을 전량 처분했다. 이 헤지펀드는 지진 직전까지만 해도 일본 증시의 약세에 대비해 주가가 떨어지면 이익이 나도록 선물을 매도해놓고 있었다. 일본 주식 현물에 투자한 펀드의 위험을 헤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11일 도호쿠(東北) 지역에서 대지진과 초대형 쓰나미가 발생,막대한 피해를 입자 펀드 운용팀은 기존의 전략을 완전히 뒤집었다. 지진 충격으로 주가가 일시적으로 급락하겠지만 곧 일본 경제의 탄탄한 펀더멘털이 부각되며 반등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자브르 경영진은 헤지 거래를 모두 풀고 기존 일본 투자분을 전액 매수로 돌렸다. 일본 주식에 대해 100% '롱'(매수) 전략으로 바꾸자 펀드 자산에서 일본물 비중은 9%에서 15%로 치솟았다. '일본에서 한몫 제대로 잡자'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원전 폭발이라는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나면서 펀드 운용에 차질이 생겼다. 잇따른 방사선 누출 사고로 공포심이 퍼지며 일본 경제의 불확실성도 계속 커진 것이다. 닛케이평균주가는 반등하기는커녕 15일 10.55% 급락하는 등 지진 발생 이후 1주일 새 10.21% 추락했다. 일부 펀드의 1개월 손실률이 10%에 달하자 펀드 운용팀은 결국 더 이상 못 버티고 23일 일본 투자분을 전량 처분했다.
흥미로운 점은 펀드 운용을 총괄하는 이 회사의 대표 필립 자브르(50)의 이력이다. 레바논 태생의 영국인인 그는 글로벌 헤지펀드인 GLG파트너스에서 탁월한 수익률로 능력을 인정받은 스타 매니저 출신이다. 2006년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세워 독립한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반등장에 과감하게 투자해 고객들에게 큰 수익을 안겨줘 주목받았다. 자브르는 지난해 유럽 재정위기로 투자자들이 몸을 사리자 "너무 겁먹는다"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번 일본 투자에선 쓴맛을 본 셈이다. 최웅준 한국투신운용 헤지펀드담당 팀장은 "자브르는 과거 전환사채와 주식을 활용한 차익거래에서 큰 이익을 내 명성을 얻은 인물"이라며 "이번엔 원전 사태를 미처 생각하지 못해 손실을 입었다"고 설명했다.
세계 금융시장을 주무르는 큰손들이 지진에 '한 방' 먹은 사례는 많다. 1995년 고베대지진이 빌미가 돼 파산한 투자은행 베어링스의 니컬러스 리슨이 대표적이다. 그는 싱가포르와 일본 증시에서 일본지수선물 차익거래로 막대한 수익을 내다가 고베대지진으로 일본 주식이 폭락하자 큰 손실을 입었다.
리슨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한 매매를 계속하다가 결국 13억달러의 손실을 입히고 135년 역사의 베어링스를 문닫게 했다.
◆ 헤지펀드
hedge fund.주식 채권 파생상품 실물자산 등 다양한 상품에 투자해 목표 수익을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펀드다. 불특정 다수로부터 자금을 유치하는 공모펀드보다는 대규모 자금을 굴리는 소수의 기관 고객을 상대하는 사모펀드 형태가 일반적이다. 현물과 선물을 결합한 다양한 투자전략을 사용하며 목표 이상의 수익을 내면 펀드 운용사는 높은 수준의 성과급을 챙긴다.
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