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만부 팔린 '롤모델'…이번엔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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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대상 열두 번째 시리즈 '무엇이 될까보다…' 출간1939년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 신학과정인 을(乙)조 5학년 졸업반 수신(修身 · 윤리과목) 시험.조선에 대한 황국 신민화 정책이 강화되던 일제 말기였던 만큼 어처구니없는 문제가 출제됐다. '조선 반도의 학도에게 보낸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 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것이었다.
성공에만 너무 집착말고
자신부터 다듬어
실천하는 리더십 갖춰야
1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던 한 학생이 종이 울릴 무렵 작성한 답안은 이랬다. "1.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2.따라서 소감이 없음." 이 일로 교장의 질책을 받았던 학생이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다. 지난달 선종 2주기를 맞은 김 추기경의 삶을 다룬 책 《무엇이 될까보다 어떻게 살까를 꿈꿔라》(명진출판 펴냄)가 출간됐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다룬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로 잘 알려진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의 열두 번째 책이다. 가톨릭 계열의 평화방송에 근무하는 아동문학가 김원석 씨가 썼다.
이 책은 '김수환 추기경은 왜 훌륭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식민 지배에 대한 민족적 분노와 정의감을 가졌던 소년이 열정과 성실,타인에 대한 섬김,불의와 인권 탄압에 맞서는 용기를 갖춘 사회 · 종교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저자는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지도자 중에는 개인적인 탐욕을 앞세우는 사람이 많은데 김 추기경은 격동의 우리 현대사에서 무엇이 소중한 가치인지를 일깨워 주고 몸소 실천한 지도자"라고 설명한다.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성인이 읽어도 감동적이다. 이 책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떠돌아 다니던 옹기장수 밑에서 5남3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 추기경이 독실한 신앙인이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신학교에 들어간 일,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방황한 얘기,일본 유학 시절 어쩔 수 없이 학도병에 나섰던 일 등 성장과정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6 · 25전쟁 중 뒤늦게 사제 서품을 받고 독일 유학 이후 가톨릭 개혁과 민주화에 참여한 일도 자세히 담았다.
무엇보다 사회적인 문제와 인간의 영혼을 구제하는 신앙인의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노력했던 김 추기경의 고민과 노력이 잘 드러난다. 종교와 세상의 소통을 추구했던 그는 1969년 한국 최초이자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된 뒤에도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몸을 낮췄다. 그는 TV로 생중계되는 성탄절 자정미사 강론에서 장기 독재를 비판했고 5 · 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도 교황청과 세계에 알렸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시위를 벌이다 명동성당에 피신한 학생들을 잡으러 온 안기부 관계자들에게 "나와 신부들과 수녀들을 모두 밟고 지나가야 학생들을 데려갈 수 있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학생들에게는 자진 해산을 설득했다.
저자는 "김 추기경은 독재 정권에 대해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공개적으로 물을 수 있었던 용기를 가진 분으로 사회 정의와 인권,평화,사랑의 정신을 펼쳐 보인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라며 "청소년들이 무엇이 돼 성공할까에만 몰두하지 말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다듬으며 성장할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명진출판이 2007년부터 출간한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는 반 총장을 비롯해 버락 오바마,힐러리 클린턴,워런 버핏,스티브 잡스,오프라 윈프리,이병철,후진타오,앤디 워홀 등을 다뤘으며 누적 판매량은 170만부에 이른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