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핵심부품 1주일 내 바닥"…보잉·애플도 한계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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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發 '서플라이 체인 붕괴' 충격 확산
금융위기 이후 재고 축소가 '부메랑'…글로벌 車ㆍIT업체들 '비상체제' 돌입
2008년 가을 미국발(發) 금융 위기 이후 글로벌 기업들은 부품 조달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재고=비용'이란 인식 아래 재고량을 크게 줄였다. GM,지멘스,폭스바겐,애플,인텔 등 글로벌 기업 대다수가 필요한 부품을 필요한 만큼만 적시에 공급받겠다는 전략을 취했다. 외주 범위도 넓혔다. 주요 협력업체를 간추려 이들에게 핵심 부품까지도 아웃소싱을 맡겼다. 당시 '비용절감'이란 목표는 어떤 기업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목표였다.
◆글로벌 공급망 붕괴 장기화'3 · 11 일본 지진' 이후 채 한 달도 안돼 유력 글로벌 기업들이 일본발(發) 부품 공급 부족 사태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 금융위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한 폭스바겐마저 다음달 초면 핵심 부품의 재고창고가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고 인정했다. 세계 최대 항공업체인 보잉을 비롯 애플,인텔도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비용 절감이라는 금융 위기의 교훈이 역설적으로 일본 지진 후폭풍의 위력을 더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곳곳에선 이미 서플라이 체인(부품 공급 사슬) 붕괴가 현실화하고 있다. 보잉은 워싱턴주 에버렛 공장에서 만드는 신형 787기의 생산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항공산업은 비행기 동체를 몸통,날개,꼬리 등 몇 개로 나눠 각각 다른 공장에서 만든 후 이것들을 한 데 모아 조립하는데 보잉은 부분품의 3분의 1을 가와사키중공업 등 일본에서 들여온다.
자동차 산업의 생산 차질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내에선 르노삼성자동차가 다음달 한 달간 부산공장의 차량 생산을 20% 줄이기로 했다. 프랑스 르노 본사 역시 닛산과 부품 공동 사용 등의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탓에 생산 중단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일본 혼다도 30일 북미 전 공장에서 감산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IT(정보기술)업계 역시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KOTRA 프랑크푸르트KBC에 따르면 독일 IT업계의 유통망이 보관하고 있는 재고량은 다음달 초면 현격히 줄어들 전망이다. 칩,컨트롤보드,배터리 등의 품귀 현상까지 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글로벌 파운드리 등 싱가포르의 70여 개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대체 공급선을 발굴하기 위한 프로젝트팀을 발족시켰다.
◆기업들 부품 조달 전략에 혼선
일본 지진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여파가 큰 것에 대해 한선희 KOTRA 통상전략팀 처장은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기업들이 구매 전략을 대폭 수정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큰 변화가 재고 보유 기간이었다. 부품 재고를 쌓아두지 않고 필요한 때마다 받아 납기를 맞추는 도요타식 'JIT(적기 생산) 시스템'이 유행처럼 번졌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멘스는 작년 초 지역 · 사업별 단기 구매 정책을 도입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전만 해도 보통 재고는 3개월 분량을 유지했는데 위기를 겪고 난 이후엔 5주 안팎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워낙 수요가 침체돼 있던 상황이라 새로운 협력업체를 발굴하는 일도 뒤로 미뤄졌다. 당시 GM 등 글로벌 기업들은 대대적인 협력업체 정비를 단행하면서 일부만 주력 공급처로 남겨 두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떨궈냈다.
전문가들은 일본 지진 사태로 기업들의 부품 조달 전략에 큰 혼선이 빚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부품 적기 조달과 풍부한 재고 확보라는 상반된 전략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웃소싱 지역을 전 세계로 확대하느냐,아니면 역내로 통합하느냐의 문제도 이슈로 등장할 전망이다. 컨설팅업체인 액센추어가 미국 소재 제조업체 287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이 치솟는 물류비와 운송비에 일본 지진까지 겹쳐 저임 기지로 활용해 온 아시아 현지 공장들을 남미나 미국 본토로 이전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박동휘/이유정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