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기로에 선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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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방사능 공포는 원전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한 쪽에서는 "원전이냐, 정전이냐"며 당장 원전을 대체할 마땅한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이번 사태가 원전의 안전을 향한 새로운 혁신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원전 르네상스는 끝났다"고 단언하는 이들도 나오고 있다. 사태가 어느정도 수습된 후 일본이 어떤 선택을 하고 나올지 두고 볼 일이지만, 원전 중심의 에너지 프레임으로 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결코 남의 일일 수 없다.
정부가 범부처적인 원전 · 방사능 컨트롤타워를 만든다고 한다. 일본 사태의 파장이 심각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특히 일본 정부의 대응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고, 그 불똥이 우리에게 튈지 모른다는 우려도 깔린 듯하다. 벌써 국내 환경단체들은 반핵 캠페인에 돌입했다. 이에 국내 과학단체도 적극적인 맞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거와 다른 양상이다. 과학자들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미디어나 일반인들의 우려와는 달리 "우리 원전은 안전하다"거나 "방사능 공포는 과장됐다"고 말한다. 문제는 국민들이 과학자의 이 말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에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홍역을 치렀던 2008년의 일이다. 당시 과학자들이 제 역할을 못했다고 자책했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그 해 연말 '과학기술과 사회, 불신과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포럼을 열었다. 그 때 홍성욱 서울대 교수의 주제발표는 지금 읽어봐도 유념해야 할 대목들이 적지 않다.
과학자들은 확률로 위험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홍 교수는 '객관적 확률'과 대중들의 '주관적 인식'의 차이점에 주목할 것을 주문했다. 스키를 타다가 죽을 확률이 원전 옆에 살다가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자는 기꺼이 즐기고 후자에 대해서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위험에 대해서는 훨씬 관대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된 위험에 대해서는 위험을 느끼는 정도가 1000배나 더 증폭되더라는 발견에서 나온 얘기다. 반핵단체들은 '실제 위험'과 대중들이 느끼는 '위험체감도'의 틈바구니를 파고든다. 사람들이 '결과의 끔찍함(dread)'과 '미지의 정도(unknown)'에 비례해 위험을 체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게 일본은 더 없이 좋은 사례다. 그들은 '공포'와 '미지'를 어떻게든 극대화하려고 한다. 대중 미디어의 선정성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이에 맞서려면 과학자들이 확률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대중들의 위험체감도를 낮출 수 있는 신뢰가 그것이다. 과학적 진실도 어떻게 사용되고, 소통되느냐에 따라 과학적 진실로 인정받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과학자 몫이라고만 할 수 없다. 정부야말로 더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다. 과학자들마저 의견이 엇갈릴 경우 최종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은 정부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컨트롤타워를 만든다고 해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신뢰라는 것은 쌓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비대칭성을 갖고 있다. 위기감을 갖고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는 순간 에너지정책을 이끌어가는 정부의 리더십도 끝이다.
안현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
정부가 범부처적인 원전 · 방사능 컨트롤타워를 만든다고 한다. 일본 사태의 파장이 심각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특히 일본 정부의 대응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고, 그 불똥이 우리에게 튈지 모른다는 우려도 깔린 듯하다. 벌써 국내 환경단체들은 반핵 캠페인에 돌입했다. 이에 국내 과학단체도 적극적인 맞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거와 다른 양상이다. 과학자들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미디어나 일반인들의 우려와는 달리 "우리 원전은 안전하다"거나 "방사능 공포는 과장됐다"고 말한다. 문제는 국민들이 과학자의 이 말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에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홍역을 치렀던 2008년의 일이다. 당시 과학자들이 제 역할을 못했다고 자책했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그 해 연말 '과학기술과 사회, 불신과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포럼을 열었다. 그 때 홍성욱 서울대 교수의 주제발표는 지금 읽어봐도 유념해야 할 대목들이 적지 않다.
과학자들은 확률로 위험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홍 교수는 '객관적 확률'과 대중들의 '주관적 인식'의 차이점에 주목할 것을 주문했다. 스키를 타다가 죽을 확률이 원전 옆에 살다가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자는 기꺼이 즐기고 후자에 대해서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위험에 대해서는 훨씬 관대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된 위험에 대해서는 위험을 느끼는 정도가 1000배나 더 증폭되더라는 발견에서 나온 얘기다. 반핵단체들은 '실제 위험'과 대중들이 느끼는 '위험체감도'의 틈바구니를 파고든다. 사람들이 '결과의 끔찍함(dread)'과 '미지의 정도(unknown)'에 비례해 위험을 체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게 일본은 더 없이 좋은 사례다. 그들은 '공포'와 '미지'를 어떻게든 극대화하려고 한다. 대중 미디어의 선정성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이에 맞서려면 과학자들이 확률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대중들의 위험체감도를 낮출 수 있는 신뢰가 그것이다. 과학적 진실도 어떻게 사용되고, 소통되느냐에 따라 과학적 진실로 인정받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과학자 몫이라고만 할 수 없다. 정부야말로 더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다. 과학자들마저 의견이 엇갈릴 경우 최종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은 정부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컨트롤타워를 만든다고 해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신뢰라는 것은 쌓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비대칭성을 갖고 있다. 위기감을 갖고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는 순간 에너지정책을 이끌어가는 정부의 리더십도 끝이다.
안현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