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프리 프로덕션 경쟁력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사전에 충분히 상황을 파악하고 작전 계획을 세우면 성공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에베레스트 등반에도 베이스캠프를 높게 칠수록 정상 정복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승부는 이미 출발 이전,시합 이전에 결정된다는 것이다.

소위 창조산업이라 일컫는 영화,패션,경영컨설팅,게임,광고,음악(오디오) 분야에서 해외 최고 기업과 우리나라 정상 기업 간의 격차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2009년 미국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매출액은 한국 D미디어사의 90배 수준이었다. 드림웍스의 영업이익률은 약 27%에 이르나,우리 기업들은 극히 미미하거나 대규모 영업 손실을 내고 있다. 게임 산업에서도 닌텐도는 우리나라 N사보다 매출액은 50배,영업이익은 12배나 된다. 이런 격차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영화와 같은 예술 작품을 만들 때 시나리오 탈고 후 정식 제작에 들어가기 이전 단계의 활동을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이라고 한다. 프리 프로덕션은 단순히 제작 단계를 위한 섭외나 스케줄 작성 등 단순 매뉴얼 작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출연자나 크리어처의 캐릭터 · 배경 · 소품 · 음악을 결정하고,창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는 소위 지식기반 서비스의 집합 활동이다.

최신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기술과 예술의 실시간 결합을 가능케 해 상상력과 창의력이 그래픽으로 왕성히 표현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따라서 프리 프로덕션을 통해 영화 전편이 가상 세계 속에서 사전 검증까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고,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과 작품의 질을 사전에 결정할 수 있다. 영화의 작품성과 성공 정도는 이미 프리 프로덕션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아바타의 프리 프로덕션에는 2년간 120여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예술 부문에서는 아티스트들이 캐릭터 등을 2D 디지털 개념으로 디자인한 뒤 이를 3D로 옮기면서 아티스트 · 프로그래머 · 엔지니어 간의 합동 작업을 동시에 수행했다고 한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직접 개발 · 도입한 이모션캡처 시스템,3D 퓨전 카메라로 신기술과 예술성을 결합함으로써 3D 영화의 신기원을 창조했다. 그 결과 제작비(약 250만달러)의 10배가 넘는 흥행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제작 · 생산 단계의 경쟁력으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까지 왔다. 그러나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창조형 산업을 주도해 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산업과 기업 활동에서 영화의 프리 프로덕션 개념이 승부를 결정할 정도로 강하게 접목돼야 한다. 프리프로덕션 스튜디오(가칭) 같은 정부의 맞춤형 지원정책도 절실하다. 제조업에서 본격 생산이나 연구 · 개발(R&D) 착수 단계에 앞서 사업계획,시장 분석,컨설팅,법률자문,디자인,설계 등 프리 프로덕션 경쟁력의 베이스캠프를 정상 가까이 끌어올리는 시점에 세계를 선도하는 혁신 제품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김용근 <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 yonggeun21c@kiat.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