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맘마미아' 도나로 살았던 4년…이번엔 에디트 피아프로 '환생'

● 뮤지컬 배우 최정원 씨

2년 만에 돌아온 음악연극
147㎝ 피아프의 파란만장한 삶…170㎝인 제가 되레 작아 보여요

어릴 때부터 '끼' 발산
동네에서 100원 받고 춤·노래…20세에 '아가씨와 건달들'로 데뷔

무대에서 느끼는 희열
공연 전엔 드러눕기도 하고 맨발로 걸어다니며 무대를 몸 속으로 느끼죠

시원시원하다. 뭐든지 막힘이 없고 탁 트인 느낌.생김새도 큼직큼직하다. 170㎝가 넘는 키에 서구적인 눈과 코 입.말도 청산유수다. 뮤지컬 배우 최정원 씨(42)는 무대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타고난 주연 배우' 같다.

그는 1989년 '아가씨와 건달들' 이후 거의 모든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다. 2007년 시작한 뮤지컬 '맘마미아'의 도나 역할로 무대에 선 것만 440회.그것도 더블캐스팅이 아니라 혼자서 주인공 역을 다 해낸 '악바리'다. 4년간 220여개 도시를 돌았고,이 작품으로 '세계 최고의 도나'에 뽑혔다. 22년 전 그랬듯이 지금도 무대에만 서면 그의 키는 한 뼘쯤 더 커 보인다. 지난해 5월부터 올 3월까지 10개월간 225회의 전국투어를 마친 그가 이번에는 '피아프'로 연극무대에 다시 오른다. '피아프'는 프랑스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일생을 그린 음악연극이다. 2009년 국내 초연 때 객석점유율 80% 이상을 기록한 화제작을 다시 올리는 것.그때는 공연 기간이 2주밖에 되지 않아 아쉬웠지만 이번엔 기간을 5주로 늘이고 무대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충무아트홀 중극장으로 옮겨 '땀방울 튀는' 맛을 더 살린다.


"그동안 무대에서 27명의 인생을 살았는데 실존 인물은 없었어요. 그런데 '피아프'는 달라요. 147㎝의 단신에 마약과 알코올 중독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다 마흔일곱살에 단명한 20세기 최고의 샹송 가수….2년 전 초연 때는 겁이 많이 났죠.하지만 대본을 읽고 나니 제작사인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대표님이 왜 저한테 이 작품을 같이하자고 했는지 알 것 같더군요.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제가 평소에 하던 말과 너무나 비슷했으니까요. "

그는 에디트 피아프가 미국으로 처음 공연하러 갔을 때 상처받았던 얘기를 예로 들었다. "사람들이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니까 감흥이 없어 박수도 안 치고,그래서 크게 실망했대요. 동료가 '괜찮아 이겨내.이런 건 금방 잊어버려'라고 했더니 '내 인생에 돈은 중요하지 않아.무대에서 느끼는 희열이 더 중요해'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인생이 곧 노래와 일치한다는 얘기죠.그 정신을 제가 가장 잘 보여줘야 하니 각오가 더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

초연 때 남편(임영근 뮤지컬 프로듀서)이 '무대에서 오늘처럼 작아 보인 건 처음이야'라고 격려해준 말에 그는 큰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제가 역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키 작은 피아프의 모습이 그대로 오버랩되더라는 얘기였죠.그 순간 이루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생겼습니다. "

그는 이 작품에서 두 시간 동안 17곡의 노래를 부른다.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 "두 시간 내내 몸을 뺄 대목이 없어요. 제가 물을 하루에 7ℓ나 마시는데 무대에서는 물도 못 마시고 화장실도 못 가고 소리는 있는 대로 질러야 하고….17세부터 47세까지를 연기하니까 무척 힘들죠.이번 공연에서는 1막과 2막을 넣어 잠깐 틈을 주면 좋겠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요. "그가 하루에 물을 7ℓ나 마시는 것은 공연의 퀄리티를 최고로 유지하기 위한 자기 관리의 한 방편이다. 날마다 손을 열 번 이상 씻고 세정제로 또 닦는 것도 마찬가지.공연 전날은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을 풀다가 자기도 한다. 주변에선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하지만 그는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칠 때의 뜨거운 감동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다.

공연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 그는 무대에 혼자 올라 맨발로 걷고 세트를 어루만지며 조명을 확인한다. 한 시간 이상 가만히 드러누워 온몸으로 무대를 느껴보기도 한다.

"무대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맨발로 다니면서 도나도 되고,미미도 되어 구석구석 다 걸어보는 거예요. 아무도 없고,어떤 때는 불도 꺼져 있죠.그런 순간에 가장 예민해져요. 뮤지컬 '겜블러' 공연 때도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을 수백번이나 연습했는데 계단을 보지 않고 뛰어 내려올 수 있을 만큼 하죠.난간을 잡고 내려올 정도로는 제대로 몰입이 안 되거든요. 남들이 모르는 습관인데 무대 세트를 수십년 만져본 것처럼 제 몸에 익히려면 수백 수천번 연습하는 수밖에 없죠."그는 '운동광'이기도 하다. 수영과 스쿼시,스키,수상스키 등 못하는 게 없다. 특히 올해 72세인 어머니와 함께 수영장에 자주 간다. 이 또한 철저한 자기관리 프로그램이다. 물론 공연 중에는 혹시라도 다칠까봐 운동을 삼간다. 이런 열정과 감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는 대여섯살 때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고 한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노래하고 '공연료'로 100원을 받곤 했죠.나중엔 다섯명 이상 안 모이면 안 했어요. 잠깐 기다렸다 좀 더 모이면 하겠다고….어릴 때부터 끼가 있었나 봐요. 집에서도 온갖 역할극을 하면서 놀았죠.별난 모습을 많이 본 어머니가 연기학원에 보내준 덕분에 유관순도 되고 거지도 되면서 '연기 신동'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에밀레종'의 주인공 아역으로 처음 무대에 섰지요. "

중학교 땐 아버지의 만류로 연기 수업을 그만뒀지만 교내 노래자랑과 웅변대회를 휩쓸며 응원단장까지 지냈다. 쳇 베이커라는 트럼펫 연주자에 반해 트럼펫을 사서는 고교 때 밴드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고2 때 운명 같은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고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어요. 그때 뮤지컬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죠.주인공 진 켈리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한 뒤 너무 행복해 이리저리 장난하는데 사랑에 빠진 남자의 노래와 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그 영화를 보며 독학하다 고3 때 롯데월드예술단 1기로 들어갔지요. "

롯데월드예술단 1기생 시절 그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온 외국 선생님들에게 2년간 집중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때의 피나는 연습이 그를 '아가씨와 건달들'로 데뷔하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그의 끼는 딸 임수아(13)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수아가 여섯살 때 어린이집에서 동시 발표회를 하는데 친구들이 '수아 엄마 온다'고 하니까 얘가 '아니야,수아 엄마가 아니라 뮤지컬 배우 최정원이야' 하더라고요. 공연 때문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모자라 늘 미안했는데 그 순간 가슴이 미어졌죠.그 뒤로 집에 대본을 절대로 안 가져갔어요. 아이와 놀기 위해….수아가 음악 쪽으로 끼도 있고 작곡도 잘해요. 발레와 바이올린도 했고.김연아 보더니 피겨를 해보겠다,장재인 보더니 기타를 연주해 보겠다 난리였는데 결국 오디션 봐서 큰 소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갔어요. 이젠 '최정원의 딸이 아니라 임수아의 엄마로 만들어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죠."

지금도 너댓살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는 그는 '언제나 처음처럼,처음을 언제나처럼'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초심을 잃지 말고 늘 다시 세우자는 것이다.

"무대에 대한 경외심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저를 이렇게 키웠고 행복하게 만들어줬으니,제 인생이 드라마라면 그분들은 고마운 앙상블이죠.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제 인생의 60대가 궁금해지곤 해요. 그때는 지금의 아우라가 형광등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지만,전 믿어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멋진 배우,더 사랑받는 배우가 되리라는 걸요. "


'장밋빛 인생' '사랑의 찬가' 등 2시간 동안 샹송 17곡 부르죠

연극 '피아프' 30일부터 충무아트홀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져 버린다 해도 당신만 날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것도 필요 없어….'에디트 피아프가 사랑하는 남자를 비행기 추락사고로 잃은 뒤 머리를 삭발하고 썼다는 '사랑의 찬가' 가사예요. 너무나 절절하게 와 닿는 내용이었죠.그 슬픔으로 몸이 더 망가져 모르핀을 맞고 요양원에서 부른 노래도 마찬가집니다. '이제 3년이 될 거야.감금된 지 3년.그래,미친 사람이야…' 이렇게 이어지는데 샹송과 드라마가 가슴 뭉클하게 겹쳐지는 대목입니다. "

최정원 씨의 연극 '피아프'는 오는 30일부터 6월5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무대에 오른다. 쉴 틈 없이 전개되는 속도감과 드라마틱한 이야기,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주옥 같은 노래 17곡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1978년 영국 극작가 팜 젬스가 발표한 것으로,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피아프의 실화를 담고 있다. 2009년에 이은 앙코르 공연.

이번 공연에서도 그는 부채꼴 모양의 작은 무대에서 피아프의 인생극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두 시간 내내 샹송을 부른다. 천재적인 예술가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환희와 슬픔,고독을 온몸으로 표현하며,무대 위에서 옷을 갈아입고 노래하고 인생의 절정과 나락을 경험하며 나이를 먹어간다.

그의 노래에는 피아프의 애잔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보잘것없는 거리의 가수일 때나 최고 무대의 스타가 됐을 때나 피아프의 인생과 함께했던 주옥 같은 음악들.물랑루즈에서 만난 이브 몽탕과 결혼할 때 부른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권투 세계챔피언인 막셀 세르당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다 사고로 그를 잃고 난 뒤 만든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그의 삶을 그린 영화에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나왔던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Non,je ne regrette rien)' 등의 히트곡이 애잔한 아코디언과 피아노 선율에 실려 무대를 휘감는다. 1912년 파리 빈민가의 길 위에서 태어나 창녀촌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4년간 맹인으로 살다 극적으로 회복한 소녀.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다 술집 주인의 눈에 띄어 '에디트 피아프(작은 참새)'라는 이름으로 데뷔한 뒤 굴곡진 인생을 살다 간 '샹송의 여신'.그의 예술적 깊이와 고뇌,비애를 표현하는 배우의 열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만난 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