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은 미술…'피처링 시네마 아트'가 뜬다

시각 예술과 영화 융합한 새 장르
아이작 줄리언 등 전시도 줄이어

미국 영상아티스트 크리스천 마클레이의 24시간짜리 비디오 작품 '시계'는 수천 편의 영화 속에서 시계가 등장하는 장면만 따로 모아 편집한 것이다. 얼핏 보면 필름을 의미 없이 이어 붙인 것 같지만 시간 속을 유영하는 듯한 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보통의 영화가 줄거리에 맞춰 영상을 편집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소리에 맞게 화면을 이어 놓았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가운데 각양각색의 소리가 섞여 긴 여운을 남긴다. 최근 미술계에는 시각예술과 영화를 융합한 이 같은 '피처링 시네마(featuring cinema) 아트'가 뜨고 있다. 피처링 시네마아트는 영화의 시각적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편집한 것으로,비디오 아트의 진화된 장르다. '눈으로 본다'고만 생각하는 영상을 귀로 듣게 해 시각과 청각을 통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영화인가,미술인가

브루스 코너(미국)를 비롯해 크리스토프 지라르데와 마티아스 뮐러(독일),올리버 피에치(독일) 등 국내외 작가 9명이 서울 청담동 코리아나미술관에 마련된 '피처링 시네마'전(31일까지)에 참여했다. 이들은 비디오 아트와 실험영화를 넘나들며 작업한 싱글채널 비디오,다채널 비디오,16㎜ 필름,영상 설치 등 10점을 내놓았다. 1972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발생한 은행 강도사건의 범인에게 당시 상황을 재연하게 한 후 찍은 피에르 위그의 '제3의 기억',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모와 자식을 다룬 장면만 뽑아 편집한 호주 작가 트레이시 모펙의 '마더'는 영화처럼 바뀌는 요즘 영상미술의 흐름을 보여준다. 1950~1960년 고전영화에서 거울을 보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발췌한 지라르데와 뮐러의 영상작업 '크리스탈'도 눈길을 붙잡는다.

영국 작가 아이작 줄리언은 서울 청담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기획전에 초대됐다. 줄리언은 2004년 부산비엔날레에 '발티모어',2008년 광주비엔날레에 '웨스턴 유니언,작은 배들'을 출품해 주목받았다. 그는 내달 3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 중국에서 촬영한 작품 '텐 사우전드 웨이브'를 보여준다.

장만위와 자오타오 등 국제적인 명성이 있는 중국 여배우들과 시인 왕핑,서예 대가 공파겐이 출연한 이 작품은 상하이의 교통체증,대나무 숲과 사암 절경,영국 해안가에서 새조개를 채취하던 중국 불법 이민노동자 23명의 죽음,서구 열강이 침범한 20세기 초 상하이의 정치 상황을 차례로 되비춘다. 정연두 씨는 리움 봄철 기획전에 영상 작품 '구보씨의 일일'을 출품했다. 구보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일제 때 경성 시내를 모형으로 재현해 찍은 작품이다. 1930년대 서울 풍경이 궁금하다면 찬찬히 살펴볼 만하다. 스마트폰 영화 '파란만장'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한 박찬경 씨는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에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안양에'를 소개했다.

◆비디오 아트의 진화

백남준이 1970년대 개척한 비디오 아트는 미디어아트,멀티미디어아트,뉴미디어아트에 이어 피처링 시네마 아트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다. 피처링 시네마 아트는 영화의 미장센을 인용하기도 한다. 또 몽타주적 화면 구성을 통해 영화의 기존 스토리 구조를 해체한 후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며 현대미술을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현대미술이 영화와의 융합을 통해 영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가치와 담론을 생산해내는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