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은 골치 아파" 조정제도 악용하는 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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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 안쓰고 손쉽게 사건 해결 가능"판사가 판결문을 안 쓰려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
또다른 '전관예우 통로' 지적도 많아
4일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앞의 A 변호사 사무실.기자와 만난 A변호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준비서면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그렇지,증거도 충분하고 분명히 조정할 사안이 아닌데도…"라며 그는 분통을 터뜨렸다. 판사가 사건을 쉽게 종결시켜 버리려고 무리하게 조정을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사무실을 함께 쓰는 B변호사도 "조정은 굉장한 압박"이라며 거들었다. "승산이 70~80%가 돼도 판사가 '얼마로 합의봅시다'라고 얘기하면 안 따를 수 없어요. 그 금액을 못 받겠다,끝까지 판결로 가겠다고 하면 핀잔을 주면서 '더 불리하게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방법이 없어요. "
판사들이 조정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증가하면서 변호사들과 의뢰인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법원은 미제사건이 쌓이는 걸 꺼려 판사들의 조정 건수를 인사고과에 반영하고 있다. 판사 입장에선 부담되는 판결문을 안 써도 되니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다.
판사들이 조정을 강제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다. C변호사의 경험담이다. "판사가 1차,2차 등으로 계속 조정기일을 잡아갑니다. 당사자로 하여금 판결받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거죠.변호사를 왕따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판사가 갑자기 '원고하고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 잠깐 나가달라'고 해요. 원고와 변호사를 이간질해 소송을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죠."전관예우가 끼어들 소지가 많다는 점도 조정의 문제점.D변호사는 판결선고 날짜까지 잡아놨는데 판사가 이를 연기하고 조정을 제안한 황당한 경우를 겪었다. "법리상 매우 간단한 사건인데 갑자기 조정으로 가는 경우는 센 전관이 끼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다 이길 것으로 생각했다가 조정이 들어오면 정신이 없어지죠.뻔히 이길 사건인데도 의뢰인이 '이러다 지는 것 아니냐'며 난리를 피웁니다. 이 경우 50 대 50의 결과만 나와도 모두가 만족해하죠." 조정실에서 판사가 헌법재판관 출신 변호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장면을 본 의뢰인이 기겁을 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급기야 지난 2일 대한변호사협회 임원들이 대법원 간부들을 찾았다. 이들은 간담회 자리에서 "재판 과정의 무리한 조정을 지양해 달라"며 간곡히 건의했다는 후문이다. 강현 대한변협 사무총장은 "'이 청구는 이런 점에서 말이 안 된다'며 재판장이 심중을 드러내 조정을 권고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변호인 입장에서는 크게 당황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 조정주로 민사소송에서 원고와 피고가 다툴 때 판사가 합의점을 찾아 중재안을 제시하는 제도.조정이 성립되면 대법원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어 사건이 종결된다. 비용도 적게 들고 신속히 분쟁을 해결할 수 있어 갈수록 확산 추세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