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인물열전] (50) 주원장(朱元璋), 황제가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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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회복했지만 공포와 불신만 남겼다중국의 난징에 가면 웅장한 무덤이 있다. 유달리 의심이 많아 자신의 무덤이 있는 장소를 알리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주원장의 것이다. 그의 무덤도 가짜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그에게는 정적이 많았다.
빈한한 집에서 태어난 주원장은 동가식서가숙하는 떠돌이 부모와 함께 지대 징수자들을 피해 이삿짐도 여러 번 꾸려야 했다. 형제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16세에 홍수와 기근,전염병 속에서 부모를 잃고 혼자 성장한 그는 절에 들어가 3~4년 동안 탁발승 노릇을 했다. 글도 모르던 그에게 인생의 전기가 찾아왔다. 25세 되던 해인 1352년,천년 왕국을 신봉하는 백련교(白蓮敎)의 분파인 홍건(紅巾)군 산하 반란 단체 중 하나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여러 여건상 웅지를 펼치기 어렵다고 생각한 주원장은 홍건군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됐고,그의 수양딸과 결혼해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곽자흥의 리더십에 문제가 생겨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결집해 세력을 확장했다.
치밀한 준비 끝에 1363년 중원 서쪽의 한왕(漢王) 진우량(陳友諒) 집단,1366년 화북 홍건농민군(紅巾農民軍)의 중심이었던 대송(大宋) 한림아(韓林兒),유복통(劉福通)을 무너뜨렸다. 1367년 절동(浙東)지역의 방국진(方國珍)과 동쪽의 오왕(吳王) 장사성(張士誠)을 정복하고 1368년 송나라의 수도였던 남경에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고 했다.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그는 또 25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를 공격,마지막 황제 순제를 북경에서 몰아내고 북벌 8개월 만에 천하를 장악했다.
그는 예악을 제정하고 강력한 왕권 중심의 통치체제를 만들어나갔다. 원나라 말기 전란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며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농민들을 달래는 것도 그의 핵심 과제였다. 몸서리치는 가난을 경험한 그는 백성들의 과중한 부역과 조세 부담을 덜어줬다. 인구와 경작지를 등록해 조세 공평성을 꾀하고 불필요한 조정의 경비를 삭감했다.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대대적인 관개사업을 벌여 비옥한 농지를 농민들에게 공급한 것도 30년 치적 가운데 하나다. 그는 진시황제에 버금갈 정도의 일벌레였다. 재상제도와 삼성(三省)제도를 없애고 모든 것을 직접 개입해 처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편파적인 역사 서술을 강요하면서 많은 문인을 학살하는 이중적인 인격을 드러내기도 했다. 주원장은 오직 자신의 피붙이밖에 없다는 생각을 견지했기에 자신을 도와준 창업 동지들까지 사정없이 숙청하는 바람에 2만명이나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황위 승계를 원활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맏아들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손자인 건문제가 어린 나이에 황권을 물려받았다. 이 때문에 스무 명이 넘는 그의 아들들이 강력한 위협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동양학 전문가인 페트리샤 에브리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중국 역사상 한 개인이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예로 명태조 주원장보다 더 두드러진 경우는 없다"고 말했듯이 주원장은 팍스 몽골리카로 대변되는 몽골제국의 멸망과 중화제국 회복의 상징처럼 각인돼 있다.
그는 분명 성현의 모습과 호걸의 기풍을 동시에 갖춘 역사의 거물이었으나 만년은 고독했다. 공포와 불신만을 키운 군신관계를 설정하면서 역량 있는 인재들을 기회주의적인 소인배로 전락시켜 버렸던 것이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