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소극장 단역 10년 절절한 경험, 대박 뮤지컬 제작 큰 힘 됐죠"

● 공연기획 스타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 "이젠 연극서 고급관객 모을 차례"

김갑수…박칼린…'난 복 많은 남자', 올해에만 대형작품 12개 올려요
'아이다' 절찬 공연 중 위암 진단…"런던 출장" 속이고 홀로 수술대에
체구가 큰 줄 알았다. 10년 이상 '뮤지컬 흥행 신화'를 일군 주인공이니 그럴 법했다. 그러나 키는 보통이고 체격도 호리호리했다. 공연기획사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대표(49 · 명지대 교수).먹고 잘 데가 없어 소극장 사무실을 전전하던 그가 '맘마미아''아이다''시카고''렌트' 등 스테디셀러 뮤지컬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한국 공연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올해는 5~6월에만 연극 4편과 뮤지컬 1편 등 5편을 거의 동시에 무대에 올린다. 최정원 주연 연극 '피아프'와 김성녀 주연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차범석희곡상 당선 연극 '푸르른 날에',강부자 조민기 주연 연극 '산불'….다른 기획사들의 1년치 공연 분량이다. '산불'은 1000석 이상 대극장(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갖는 첫 연극이어서 신경이 곤두설 만도 한데 그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는다. 올해 승부할 작품이 12편이라고 했다. '작은 거인'이다. "그동안 뮤지컬 관객을 중산층 이상까지 넓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연극에서도 고급 관객을 발굴할 겁니다. 역발상으로 혁신을 하고 싶어요.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새로운 트렌드를 만드는 건 역발상에서 시작되잖아요. 돈은 하도 쪼들려봐서 웬만해선 걱정도 안 돼요. 대박 콘텐츠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감도 생겼죠.뮤지컬 '아이다'로 번 돈을 연극에 재투자하는 원년이 바로 올해입니다. 소극장이 아니고 모두 중극장,대극장에서 합니다. 가난하고 찌질한 연극은 안 할 거예요. 망할 때 망하더라도 좋은 스태프,좋은 배우,좋은 극장에서 풍요로운 무대를 만들고 싶습니다. "

그는 첫 대극장 연극 '산불'이 잘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연극의 미래가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 제작비를 8억원이나 들였으니 '미친 짓'이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제목처럼 중 · 장년층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그들의 '잃어버린 대극장'을 찾아주고 싶다는 것이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광주의 낡은 극장에서 고 차범석 선생의 '산불'을 봤죠.그때 마음에 불꽃이 일었습니다. 해남 땅끝마을 소년이 생전 처음 본 연극에 완전히 빠져들었죠.지방이라 한 시즌에 두세 편이 고작인 연극을 보려고 용돈을 아끼고 아끼던 그때부터 전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연극판에 뛰어들어 군대 3년을 제외하곤 20대를 연극에 다 바쳤다. 그러나 작은 역할만 맡았고,그나마도 선배인 김갑수 씨의 배려 덕분에 가능했다고 털어놨다.

"서울로 무작정 올라와서 전봇대에 붙은 포스터 보고 소극장을 찾아가 거기서 먹고 잤죠.그렇게 10여년 지냈어요. 그때 김갑수 선배를 만났죠.그분 없었다면 연극 때려쳤을 지도 몰라요. 오갈 데 없던 그 처절한 시절이 인생의 수련기였죠.연극에 대한 정신과 뿌리를 터득하지 못했으면 지금쯤 이런 작품할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스물한 살 때 연극에 입문했으니 29년째인데 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1990년대 중반까지는 연극에 치중하다 그때 이후 10여년 간은 뮤지컬에 올인했죠.2007~2009년 서울연극협회장을 맡으면서 '그래 기초예술로 돌아가자' 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폼잡고 산 것 아닌가 싶기도 했고.연극 '침향' 제작과정을 거치며 더 강하게 그런 생각을 했죠."

명지대에서 학생들 가르치며 1주일에 2~3회 특강하느라 주 5일은 강의에 올인하면서 작품도 5개씩 무대에 올리고 있으니 몸이 두세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잠 자는 시간 줄이면 다 되더라고요. 산전수전 다 겪어서 전 어디 내놔도 겁이 안 나요. 불가능은 없으니까. 어릴 때부터 부지런한 게 몸에 밴 건지 학교 다닐 때도 새벽에 일어나 농사 거들고 등교했지요. 하루에 5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어요. 일할 땐 '을'의 정신을 잊지 않죠.그럼 부딪칠 일이 없어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먼 꿈을 꾸는 사람'이 되면 융화 못할 게 없어요. 아,술 마실 때만 갑이죠.술은 잘 마시니까. 하하."

최근 '아이다' 성남 공연 이후 일에 열중하느라 술을 쉬고 있지만,마실 땐 막걸리 소주 폭탄주 가리지 않는 두주불사형이다. 폭탄주 40~50잔도 끄떡없다. 2005년 시작한 골프도 1년 이내에 '싱글'을 달성했다. 지금은 핸디 8 수준.

"지고는 못 살거든요. 골프장에 가면 골프 잘 쳐야 하고,술집 가면 술 잘 마셔야 하고,극장에선 연극 잘 만들어야 하고,그 판에서 잘 해야 할 것들을 잘하는 게 중요하지요. 저는 하나에 미치면 못 헤어나요. "이런 기질은 뮤지컬 흥행 비결과도 직결된다. 그가 연극 기획자에서 뮤지컬 기획자로 변신한 것은 1997년이었다. 왜 우리 관객들은 브로드웨이의 30~40년 전 레퍼토리만 봐야 하느냐는 생각에 '라이선스 공연'을 기획한 것이다.

미국 브로드웨이로 날아간 그는 뮤지컬 '더 라이프'를 골랐지만 '한국사람은 못 믿겠다. 아이디어 도용해 구닥다리 슬쩍 올렸다 내리는 도둑고양이들'이라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도둑질할 놈이 왜 대낮에 집주인 찾아왔겠느냐,한국은 기회의 땅이고 이번 기회로 정식 계약 풍토도 자리잡을 것'이라며 설득한 끝에 겨우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제작비가 6억8000만원이나 됐어요. 당시로는 엄청난 액수였죠.준비가 다 되고 연습도 끝났는데 대관료 5000만원이 부족한 거예요. 대관료를 완납하지 않으면 무대장치를 들여놓을 수 없는 극장 규정 때문에 6억원을 쏟아붓고도 공연을 못할 판이었죠.공연 5일 전 한 언론사에 지분 25%를 넘기고 6000만원을 투자받아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렸는데 외환위기에다 홍수까지 겹쳤지만 2200석이 연일 가득차는 겁니다. 앙코르 공연까지 이어졌죠."

이후 그는 '렌트''시카고''캬바레''키스미 케이트' 등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을 줄줄이 들여왔다. '할리우드 박'이라는 별명도 이때 생겼다. 그러나 실패도 많았다.

"몇 년 뒤에 들여온 유럽 뮤지컬 '갬블러'는 아르코대극장 초연 성공 후 국립극장 앙코르 공연에서 처참히 무너졌어요. 손실이 7억원에 이르렀죠.전셋집을 월세로 돌리고,아내와 두살배기 딸아이를 볼 낯도 없었어요. 4개월 동안 품고 있던 아이를 유산한 아내를 보살피지도 못하고 뉴욕으로 갔어요. 뉴욕에 있는 동안 사무실 식구들이 '사운드 오브 뮤직'을 고생 끝에 올려 매진 행렬을 이뤄냈다는 전화를 받고 눈 속에서 울며 뛰어다니던 때가 떠오릅니다. "

158억원짜리 '아이다'가 한창 흥행 중일 때 일본으로 초청 공연을 떠나려던 그는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때 출연진과 투자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런던 출장 다녀온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혼자 수술대에 누웠다. 가족도 오지 못하게 했다. 어지간히 독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복이 많은 남자'라고 한다.

"고 차범석 선생님과는 양부 양아들 관계죠.연출가 임영웅 선생님은 연극 정신의 멘토,손진책 선생은 작품의 멘토,손숙 선생은 어머니 같은 분입니다. 김성녀 씨 주연의 '엄마를 부탁해' 개막을 앞두고 원작소설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성남아트센터에서 120회 공연한 뮤지컬 '아이다'는 공연 전에 오랜 동지인 음악감독 박칼린이 스타덤에 오르면서 흥행에 불을 지폈죠."

그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재산은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말라,피해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가장 쉬우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일'이지만 뮤지컬을 10년 하면서도 의리파,연극 정신을 잃지 않은 제작자로 평가받은 것 또한 이 교훈 덕분이다.


◆ 제작비 8억 대작연극 '산불' 국립극장 무대에

1000석 해오름극장서 6월5일부터…故 차범석 5주기 기념 특별 공연

"제가 '산불'을 국립극장에 올리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경악했습니다. 약 30초 동안 침묵하다 한 분이 '박명성이는 산불 때문에 망하든가 흥하든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한번 해보라고 하더군요. '산불'은 45억원을 투입해 2007년 무대에 올렸다가 참패한 창작뮤지컬 '댄싱 섀도우'의 원작이니 이런 반응이 나올 만하죠.'댄싱 섀도우' 끝났을 때 일부러 무대세트와 의상을 몽땅 태우면서 '다시 시작이다'라고 되뇌며 언젠가 연극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했는데 그게 이렇게 일찍 오게 될 줄 저도 몰랐습니다. "

그가 내달 5~26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1000석)에 올리는 제작비 8억원 규모의'산불'(사진)은 사실주의 연극의 거장으로 불리는 극작가 고 차범석 선생의 5주기를 기념하는 연극이다. 6 · 25 전쟁 때 여자들만 남은 과부마을에 들어온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마을 여인들의 심리와 욕망이 주변 사건들과 맞물리면서 극적 완성도를 높여간다. 탄탄한 이야기와 대사,빈틈 없는 캐릭터와 구성으로 '광복 이후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았고,지금도 많은 극작가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명작.

극을 지탱하는 가장 큰 줄기는 과부인 '양씨'와 '최씨'집안,그 구성원들이 펼치는 갈등 구조다. 비극적인 전쟁 속의 빈곤한 현실을 원망하며 싸우는 두 집안과 2대에 걸친 과부의 운명을 저주하는 세대 간의 갈등,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암투를 벌이는 삼각관계의 그림자도 겹쳐진다.

1962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초연할 때만 해도 정치적,성적 제약 때문에 남북의 냉전 이데올로기라는 주제에 묶여 민족적인 비극으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과 갈등에 대한 세밀한 관찰 · 묘사로 오늘날까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특히 대형 무대를 통해 실감나게 재현되는 대숲과 산불,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 내면의 밑바닥이 정통 연극의 밀도와 깊이를 더해준다.

국내 사실주의 연출의 일인자인 임영웅 씨의 솜씨와 관록 있는 배우 강부자 조민기 권복순 장영남 서은경 이인철 씨 등의 섬세한 연기가 어우러져 더욱 관심을 끈다.

만난 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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