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과 '악마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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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루이지애나주 정부가 미시시피강 범람으로 인한 대도시 피해를 막기 위해 끝내 '악마의 선택'을 했다. 강 중류의 인공배수로 수문을 열어 물길을 돌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대로 두면 200만명이 사는 주도(州都) 배턴루지와 뉴올리언즈 등 대도시가 피해를 입지만,이 선택으로 인구 5만명의 소도시와 농장 농경지는 물에 잠기게 됐다. 이에 앞서 캐나다 중부 매니토바주 역시 대도시인 브랜든을 살리기 위해 150가구가 거주하는 인근 목장지역으로 물길을 돌렸다.
현지 언론들은 이를 '악마의 선택'으로 불렀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는 오랜 도덕의 논란거리다. 이런 상황은 국내에서 100만부 이상 팔리며 광풍을 몰고온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이 던진 질문과 매우 유사하다. 질주하는 전차의 기관사가 그대로 가면 인부 5명을 치게 될 상황에서 인부 1명만 희생시킬 수 있는 비상선로가 있을 때 방향을 틀어야 할까. 누구라도 주목해볼 만한 가치논쟁의 주제요 우리가 종종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다. 비슷한 사례로 몇해 전 국내 신종플루 백신 접종 과정을 떠올릴 수도 있다. 신종플루가 급속히 번지는 과정에서 샌델이 말하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사회적 약자부터 접종시켜야 맞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먼저 신종플루 확산의 노드(node)로 작동할 의료진부터 접종시키고 군인 학생 등의 집단에 백신을 처방한 뒤에야 노인 어린이 등으로 확대해 나갔다. 정부가 정의롭지 못해서일까. 물론 아니다. 정부는 전염 가능성 차단이란 공리주의적 기준에 충실했기 때문에 더 큰 전염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샌델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죽여도 된다는 식의 극한상황을 예로 들며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있고 한국 독자들은 그의 이런 기준들에 열광했다. 하지만 정작 샌델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한다. 인부 5명도,다른 1명도 죽게 해선 안 된다는 공허한 이상론일 뿐이다. 그것은 허구이자 기만이 된다. 루이지애나와 매니토바 사례처럼 공리주의는 지금도 정책 결정의 강력한 정의론적 준거 틀이다. 샌델 열풍이 끼치는 해독은 우리가 직면한 허다한 현실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해법의 가치를 폄훼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개인적 삶과 사회가 당면한 엄중한 문제를 가벼운 낭만주의적 담소거리로 만드는 샌델 열풍이 걱정된다.
현지 언론들은 이를 '악마의 선택'으로 불렀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는 오랜 도덕의 논란거리다. 이런 상황은 국내에서 100만부 이상 팔리며 광풍을 몰고온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이 던진 질문과 매우 유사하다. 질주하는 전차의 기관사가 그대로 가면 인부 5명을 치게 될 상황에서 인부 1명만 희생시킬 수 있는 비상선로가 있을 때 방향을 틀어야 할까. 누구라도 주목해볼 만한 가치논쟁의 주제요 우리가 종종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다. 비슷한 사례로 몇해 전 국내 신종플루 백신 접종 과정을 떠올릴 수도 있다. 신종플루가 급속히 번지는 과정에서 샌델이 말하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사회적 약자부터 접종시켜야 맞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먼저 신종플루 확산의 노드(node)로 작동할 의료진부터 접종시키고 군인 학생 등의 집단에 백신을 처방한 뒤에야 노인 어린이 등으로 확대해 나갔다. 정부가 정의롭지 못해서일까. 물론 아니다. 정부는 전염 가능성 차단이란 공리주의적 기준에 충실했기 때문에 더 큰 전염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샌델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죽여도 된다는 식의 극한상황을 예로 들며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있고 한국 독자들은 그의 이런 기준들에 열광했다. 하지만 정작 샌델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한다. 인부 5명도,다른 1명도 죽게 해선 안 된다는 공허한 이상론일 뿐이다. 그것은 허구이자 기만이 된다. 루이지애나와 매니토바 사례처럼 공리주의는 지금도 정책 결정의 강력한 정의론적 준거 틀이다. 샌델 열풍이 끼치는 해독은 우리가 직면한 허다한 현실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해법의 가치를 폄훼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개인적 삶과 사회가 당면한 엄중한 문제를 가벼운 낭만주의적 담소거리로 만드는 샌델 열풍이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