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대륙 통치엔 강력한 수단…해양강국 포기 '족쇄'

● 중국의 대운하

남·북간 연결…중앙집권체제 강화
식량 자급자족에 외부세계와 단절…잦은 왜구침입·외세침탈의 '빌미'
모든 문명이 해결해야 하는 핵심 과제인 치수(治水) 문제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는 중국의 대운하 건설이다. 대운하는 미국 뉴욕에서 플로리다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는 장장 1600㎞ 길이로 인간이 만든 가장 긴 수로다. 깊이 3~9m,최대 폭 30m의 이 운하는 60개의 교량과 24개의 갑문(閘門)으로 해발고도 차이와 수위를 조절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여러 지방에서 운하들이 불연속적으로 건설됐다. 진 제국이 성립된 이후 기존 운하들을 연결하고 여기에 새로운 운하들을 추가로 건설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이후 수나라 때인 610년에 대운하가 사실상 완성됐다. 수 제국은 500만명의 남녀 노역자를 가혹하게 몰아붙여 단 6년 동안 무서운 속력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운하 건설은 만리장성 축조보다 더 힘든 사업이었다. 이 일에 동원된 사람들은 맨손에 삽 하나로 작업을 했으며,그런 가운데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운하는 황허(黃河)와 양쯔강(揚子江,長江)이라는 두 강과 그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세계 최대의 내륙 수상 운송 네트워크다. 사실 북부 중국의 황허 유역과 남부 중국의 양쯔강 유역은 상이한 별개의 문명권이라 할 수 있다. 중국 문명이 처음 탄생한 황허 유역은 빙하가 물러나면서 생긴 뢰스(loess)라 불리는 누런 옥토(沃土)로 덮여 있었다. 이 뢰스 성분이 강물에 들어가 세계에서 가장 탁한 강물이 됐다. 이 침전물이 하류 지역에 쌓여 황허가 자주 범람하는 것이 역대 제국의 주요 고민거리였다. 북중국 고원지대의 비옥한 토양에서 풍부한 강물을 이용해 수수를 경작하며 황허 문명이 발달했다.

반면 양쯔강 유역은 원래 거대한 늪지여서 문명화된 대규모 정착 사회가 형성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점차 건조화가 진행되고 벼농사 기술이 발전해 결국 이곳이 중국 최대의 식량 생산지역으로 발전했다. 대운하는 이 두 지역을 연결시켰다. 남중국의 테라스식 언덕배기 논에서 생산한 쌀은 내륙 수로를 통해 황허 유역에 위치한 대규모 인구 중심지와 군대에 송출됐다. 이렇게 해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 단일한 전국시장으로 통합됐고,북방의 호전적 기마 유목민들의 지속적인 위협을 막을 수 있었다. 운하가 중국 통합성의 핵심 요소라는 점은 로마제국과 비교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로마제국에는 중국의 수로와 같은 통합 추진력 요소가 없었다. 유럽의 주요 수상 동맥이라 할 수 있는 다뉴브강과 라인강은 유럽 문명의 초기 허브(hub) 지역인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흐르기 때문에 제국의 통합성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한편 지중해는 개방된 바다이므로 강에 비해 통제가 훨씬 어려웠다.

이 때문에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 대륙은 상호 경쟁하는 다수의 국가들이 분립하는 상태가 됐다. 반면 중국은 로마와 동시대의 제국인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계속 통합적인 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강력한 통합성이 근대에 중국이 세계사 무대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대운하는 제국의 생명선인 쌀 운송을 원활하게 했고,조세 수취인 · 관료 · 군인들의 이동이 편리해 중앙정부의 통치에도 큰 도움이 됐다. 운하는 해적이 들끓는 해로를 대신해 제국 전체의 수송을 책임졌다. 중국은 굳이 바다로 나갈 필요가 없었으므로 갈수록 내향적(內向的)이 됐다. 원래 중국이 바다로부터 절연된 것은 아니었다. 명대 초까지 중국은 동남아시아나 인도양 연안 지역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해안까지 대규모 함대가 항해한 유명한 정화의 원정(1405~1433)은 명나라 초 중국의 해상력이 세계 최강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1433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급작스럽게 해상 세계와 절연하고 스스로 문을 닫아걸었다. 황제는 칙령을 통해 중국인의 해외 항해 및 외국인과의 접촉,원양항해 선박의 건조를 금했다. 심지어 마스트 2개 이상의 배도 금지할 정도였다. 정화의 거대한 전함들은 방치돼 썩었다. 해군에 종사했던 선원들은 대운하를 오가는 작은 배로 옮겨 탔다. 중국은 자신의 해상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고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멀어져갔다.

아마도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것이 해금(海禁) 정책을 취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중요한 점은 중국이 바다를 버리고도 거대한 제국을 훌륭하게 운영할 능력을 구비했기 때문에 그런 방향전환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1411년 새로운 대운하가 완성됐다. 수로는 베이징 너머로까지 확대됐고,갑문체제가 더욱 발달해 이제 건기에도 고산지대의 최고점에 달하도록 충분한 물을 대서 연중 운항이 가능해졌다.

대운하는 양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제국의 중앙집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제국의 경제와 행정이 잘 운영됐다는 점은 기근이 들었을 때 운하로 곡물을 날라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탁월한 시스템이 갖춰졌다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반면 이런 체제는 내부 혁신성을 떨어뜨리고 외부와 단절시키는 결과도 가져왔다. 황제와 그 주변의 보수적인 신유교 관료들은 지주계급과 결탁해 상인층을 힘으로 억눌렀다. 또 과도하게 자족성을 고집하다 보니 결국 세계와 단절됐다.

바다라는 중요한 무대를 스스로 버린 이후 중국 해안지역은 당장 왜구의 침탈에 무방비 상태가 됐다. 길게 보면 1839~1842년의 아편전쟁 중에 영국의 증기선 포함(砲艦)들이 이 무력한 제국의 내부로 밀고 들어온 것도 먼 연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